강달러를 보유한 미국 소비자들은 값싸진 외국산 제품 쇼핑, 해외여행, 유럽 주택 구매 등 달러 쓰는 재미가 쏠쏠하게 됐다. 반면 ‘역환율 전쟁’의 희생양은 거의 전 세계다. 한국, 캐나다, 뉴질랜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등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인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입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를 걱정해야 한다. 대부분 원자재가 달러로 표시되기 때문에 한국, 중국, 인도처럼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받는 충격은 더욱 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정변으로 치달은 스리랑카는 물론 파키스탄, 튀니지, 에콰도르 등 53개 채무국을 극도의 취약국으로 지목했다.
유로존 상황도 예사롭지 않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달러 대비 1.6배였던 유로화 가치는 유럽연합(EU) 창설 이후 거의 최저치인 1 대 1 등가까지 내려왔다. 유로존의 인플레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및 곡물 가격이 치솟아 지난달 사상 최고치인 8.6%를 기록했다. 유로존 내 버팀목인 독일은 생산원가 상승과 중국 경기 둔화로 수출 증가세가 꺾여 이달 30년 만에 처음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인플레 원인이 미국처럼 수요 견인이 아니라 공급 충격에 따른 비용 상승이라며 경기 위축 등 역효과를 우려해 금리 인상을 주저했던 유럽중앙은행(ECB)마저 지난 21일 0.5%포인트 전격 인상을 단행했다. 동시에 남유럽 채무국들의 채권 매입을 사실상 무제한 약속했지만, 앞길은 살얼음판이다.
과연 강달러의 끝은 어디인가. 최악의 시나리오는 신흥경제권의 국가 부도 도미노와 유로존의 붕괴 위기다. 특히 유로존은 채무국 리스크 외에도 대러 제재 공조에 균열이 생길 위험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는 가스관 밸브를 쥐고 올겨울 유럽의 숨통을 더 조일 전망이다. 유럽지역 가스는 40%가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돼 석탄이나 원유와 달리 미국 등 어느 우방국도 단기간에 대안을 마련해줄 수 없다. 러시아 가스 공급이 완전 중단될 경우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은 3.4%포인트 낮아지고 인플레는 2.7%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스위스금융그룹 UBS는 추산한다.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유로존의 불황으로 유로화 가치가 미화 0.90달러까지 추락한다면 유로 존재가치 논란이 일고 2012년 유럽재정 위기 때처럼 유럽통합론과 회의론 간 충돌이 재연돼 세계무역은 거센 풍랑을 만날 수 있다.
그나마 최선의 시나리오라면 강달러시대였던 1980년대의 데자뷔다. 당시 폴 볼커 Fed 의장의 초강수로 인플레를 잡고 호황기를 맞은 미국에는 일본산 등 저렴해진 외국산 제품이 넘쳐났다. 그 결과 실직 위기에 내몰린 미국 노동자들은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G5 경제 선진국 회의를 통해 각국의 정부 개입을 통한 환율 조정으로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를 평가절상하고 미국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른바 1985년 플라자합의는 일본엔 장기 불황, 한국엔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최근 미 대통령과 재무장관이 한국을 다녀갔지만, 2020년 3월과 같은 한·미 통화스와프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당시 Fed는 팬데믹으로 올스톱된 세계 경제를 되살린다는 명분으로 9개국과 긴급 협정을 체결했다. 지금은 차라리 미국 기업들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길 바라는 편이 더 현실적이겠다. 미국의 보잉, 마이크로소프트 등 수출 기업들은 해외 매출 감소, 수익성 악화, 주가 하락으로 지출 축소를 계획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주요 원자재 가격도 여름이 지나면 미국 수요 둔화와 강달러 영향으로 떨어지기 시작할 수 있다. 지난해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의 절반을 차지한 연료제외 수입물가는 지난 5월, 6월 연속 소폭 하락했다. Fed의 때늦은 매파적 통화정책이 감속할 가능성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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