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지켜봤는데, 다들 그랬다. 지난 22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를 찾은 이들은 하나같이 ‘핀란드의 빛’ 앞에 멈춰 섰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림 속 방문 밖으로 보이는 핀란드의 만년설이 서울의 7월 무더위를 식혀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중그림’(그림 속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은채 작가가 ‘몽상의 집(The House of Reverie)’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작가는 아늑한 조명이 비치는 실내공간을 그린 뒤 그 속에 각 분야 거장들의 모습이나 작품 등을 그려넣는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그에 대해 “이중그림과 빛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상상력을 깊게 탐구하는 작가”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 25점 중 22점은 동서양의 명화나 클래식·재즈 거장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핀란드의 빛’에서 벽에 걸린 인물사진은 핀란드의 작곡 거장 장 시벨리우스다. 작품 ‘한낮에 사라져버린 추억’에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가 등장하고, ‘Stone Flower’에는 ‘보사노바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나온다. 이 작가는 풍경화 세 점에도 문화적 코드를 담았다. 예컨대 ‘Going home’에는 드보르자크의 초상화와 함께 그의 음악인 신세계 교향곡 2악장에 어울리는 풍경을 그렸다.
그가 자신의 그림 속에 그려놓은 명화를 단순한 모작 수준일 것으로 지레짐작하면 오산이다. 이 작가는 “2015년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를 작품 속에 그렸는데, 작품을 본 원작 소장자가 ‘원작 못지않다’고 말한 게 소문이 났다”며 “그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박연폭포가 들어간 제 그림을 매입한 사실이 더해지면서 ‘박연폭포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박연폭포가 들어간 작품이 두 점 걸렸다.
실존 인물이나 잘 알려진 명화를 작품에 그려넣는 작가는 흔치 않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이중그림 화가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이전에는 줄곧 촛불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촛불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의 그림을 접하고 그 아늑한 분위기와 품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리는 실내 공간에도 꼭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품에 그려넣어 봤는데 마음에 쏙 들었어요. 소설의 ‘옴니버스식 구성’ 같은 거죠. 그 이후 다양한 고급 문화의 코드를 제 작품에 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가는 방 안 풍경과 조명을 그리는 데도 많은 공을 들인다. 명화 등 중심 이미지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다. 예컨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등장하는 ‘찬란한 창가’ 작품에서는 벽지와 가구를 차분한 노란색과 초록색조로 칠했다. 금색의 ‘키스’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색을 쓴 것이다.
작품은 사실적이다. 그림 속 사진을 보고 “진짜 사진을 ‘콜라주’한 것 아니냐”고 묻는 관람객도 많다고 한다. 이 작가는 “그만큼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하루 12시간씩 그리는 데도 10호짜리(가로 53㎝, 세로 41㎝) 한 점을 완성하는 데 보름이 걸린다”고 했다.
이 작가는 앞으로 삼중, 사중 그림도 시도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림 속 사진에 등장하는 액자에 또 다른 사진이나 명화가 나오는 식이다. 그림 크기가 작아지는 데다 작품과의 연관성도 감안해야 하는 만큼 이중그림보다 작업이 고될 수밖에 없다.
“가장 힘든 건 동양화예요. 유화 물감으로 먹의 느낌을 내기가 어렵거든요. 그래도 명화를 그리며 거장들의 의도를 생각해보고 깊이 공부한 덕분에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느다란 아크릴붓으로 하루 종일 그리면 온몸이 뻐근하지만 제 그림을 보고 좋아할 관람객들을 생각하고 힘을 냅니다.”
전시는 8월 1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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