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와 환호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일부 관객은 일어서서 박수를 보냅니다. 이번 공연이 경기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서 마시모 자네티가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든 공연임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자네티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무대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25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경기필하모닉의 ‘베르디 레퀴엠’ 공연 커튼콜 현장입니다.
자네티는 지난주 간담회에서 “(베르디 레퀴엠은) 의도를 갖고 마지막 작품으로 고른 게 아니다“ “슬픈 곡으로 임기를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다”고 거듭 밝혔습니다. 당초 2020년 3월 공연하기로 예정돼있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올해로 연기한 것인데 ‘고별 무대’가 된 것이죠. 그는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침체, 유럽에서 이어지고 있는 전쟁, 기후 변화와 가뭄 등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시기적으로 적절한 작품”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베르디의 레퀴엠이 부쩍 더 자주 연주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망자(亡者)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이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죽음의 공포와 상실의 고통을 위로하는 음악으로 이 작품만큼 적절한 곡도 없을 듯합니다. 자네티의 의도는 아니지만 4년간 애정을 가지고 이끈 오케스트라와 이별하는 공연의 레퍼토리로 잘 어울립니다. 오페라에 조예가 깊은 자네티가 ‘망자의 오페라’로 불릴 정도로 전례음악답지 않게 극적인 요소가 많은 베르디 작품을 지휘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규모가 상당합니다. 위너오페라합창단과 고양시립합창단이 함께한 합창단이 90여 명,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까지 합치면 약 200명이 무대와 합창석을 채웠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열린 레퀴엠 공연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여기에 합창단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두 번의 레퀴엠 공연에서는 합창단이 마스크를 쓰고 노래를 불러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런 규모의 연주자들이 어떤 소리를 뿜어낼지 기대가 됐습니다.
자네티와 함께 등장한 이날의 솔리스트들인 소프라노 손현경,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멜리스, 테너 김우경, 베이스 연광철이 오케스트라와 합창석 사이에 자리 잡습니다. 자네티가 리허설 등을 통해 그곳을 적절한 위치로 선택했겠죠. 솔리스트들의 자리는 공연장 구조나 음향 환경, 악기 배치 등에 따라 지휘자가 정하는데요. 보통 지휘자와 나란히 오케스트라 앞에 서거나 현악파트와 관악파트 사이에 자리잡기도 합니다.
합창 파트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첼로의 가녀린 탄식으로 시작하는 현악의 반주에 맞춰 합창단이 부르는 입당송 레퀴엠이 흘렀습니다. 자네티는 특유의 유연한 제스처와 손짓으로 셈여림과 완급을 조절했습니다. 현악과 합창이 오묘하게 어우러지며 음악 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자비송(키리에)에 이어 이 작품의 시그니처인 ’분노의 날(DIES IRAE)’이 폭발합니다. 굉장한 볼륨입니다. 보통 팀파니와 큰북(베이스 드럼) 한 대의 타격으로 ’분노의 날‘을 여는데 자네티는 큰북을 한 대 더 동원했습니다.
세 명의 타악기 연주자가 팀파니와 큰북 두 대를 힘차게 두드리는 타격음이 포문을 열자 90여 명이 일제히 내뿜는 분노의 소리가 음악홀과 청중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지난해 마스크를 쓰고 부르는 ’분노의 날‘을 두 차례 들어봤는데 역시 마스크를 벗어 던진 합창의 소리는 달랐습니다. 물론 합창단 규모도 커졌습니다. 드넓은 음악홀 공간을 터뜨리기라도 할 기세입니다. 자네티는 역동적이고 세세한 동작으로 ’분노의 날‘을 장악했습니다. 합창이 일제히 멈추고 울리는 잔향까지 일품입니다. 이런 ‘분노의 날’을 실연으로 접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날 공연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만 솔리스트들의 가창이 전반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원래 예정된 솔리스트 중 두 명이 건강상의 이유로 교체됐고, 연광철은 거의 공연 막판에 합류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연습량이 부족해서일까요. 개개인의 솔로뿐 아니라 듀엣, 3중창, 4중창 등 솔리스트들의 파트가 대부분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가수들이 무반주로 함께 부르는 중창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반주와도 조금씩 어긋나는 대목이 들렸습니다.
가창이 음악에 녹아들지 못해 오페라 같은 레퀴엠인 이 작품의 서정적이고 극적인 감동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에 비해 솔리스트들의 집중력이 떨어졌습니다. 일부 솔리스트의 컨디션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자네티는 늘 그렇듯이 악보 없이 춤추는 듯한 왼손 지휘와 유연한 몸놀림으로 다채로운 관현악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마지막 곡 ‘리베라 메(LIBERA ME)’를 함께 부르는 소프라노와 합창의 가창이 잦아들면서 90분 가까운 대작이 마무리됐습니다. 자네티가 연주의 여운을 갈무리하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집니다. 약 10분간 앙코르 없는 커튼콜이 계속됐습니다.
커튼콜의 주인공은 단연 자네티입니다. 이날 공연뿐 아니라 약 4년간 경기필하모닉과 함께하며 만들어낸 음악에 보내는 갈채여서 끊일 줄 몰랐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자네티는 몇 번이고 정하나 악장을 비롯한 단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관객들에게 인사한 후 정 악장의 손을 이끌고 무대에서 내려갔습니다.
자네티는 이번 공연을 마치고 당분간 휴식기를 가질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간담회에서 자네티는 “음악감독 자리는 내려놓지만 앞으로도 경기필하모닉과 공연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지난 6월말 요엘 레비가 5년(2014~2019년)간 음악감독으로 몸담았던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을 멋들어지게 지휘하는 것을 봤습니다. 경기필하모닉과 자네티의 인연도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자네티가 코로나19 탓으로 좌절돼 못내 아쉬워했던 오페라 ‘코지 판 투테’나 ‘맥베스’, 말러 교향곡 공연을 경기필하모닉과 함께하는 모습을 언젠가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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