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현 신임 금융위원장이 “금융 산업에서 방탄소년단(BTS)과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근 열린 제1차 금융규제혁신 회의에서다. 그런데 왠지 흘러간 레퍼토리처럼 들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의 삼성전자’ ‘한국판 골드만삭스’ 등 포장만 바꿔가며 비슷한 청사진이 이어진 탓이다. 원조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다. 2003년 12월 국정과제 회의에서 “서울을 아시아 금융 허브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2007년까지 규제·감독 시스템 혁신으로 기반을 구축하고, 2012년에 자산운용업 중심의 금융허브를 완성한 뒤 2020년까지 홍콩·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3대 금융허브로 발전한다는 로드맵까지 내놨다.
세계는 디지털 금융허브 전쟁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현실은 초라할 정도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내놓은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의 금융 경쟁력은 세계 주요 60여개국 중 23위다. 그사이 메모리반도체 등을 앞세워 제조업이 글로벌 위상을 높이고, 음악·드라마·영화 등 K컬처가 세계 문화시장의 주류로 부상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은행은 막대한 돈을 벌고 있지만 금융 서비스 산업의 국가 경제 기여도는 형편없다. 국내총생산(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기준 미국 8.41%, 영국 7.79%, 중국 7.78%인데 한국은 5.42%에 머물고 있다. 금융 산업의 고용 창출 기여도 역시 2.89%로 미국 5.07%, 영국 3.29% 등에 비해 한참 떨어져 있다.
때마침 세계 금융 주도권 싸움의 판이 바뀌고 있다. 핀테크로 대변되는 디지털 금융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기존 금융을 대체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미래 금융의 주력으로 떠오르는 추세다. 핀테크를 필두로 오픈뱅킹, 디지털 플랫폼, 인공지능(AI)형 금융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기회가 열리고 있다. 디지털 금융 시장 규모는 2025년에 460조달러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각국이 ‘디지털 금융 허브’ 구축에 사활을 걸고 나선 이유다. 실리콘밸리와 뉴욕이 앞서가는 가운데 런던이 추격하고 있다. 아일랜드 더블린, 룩셈부르크는 물론 우리 경쟁 상대인 홍콩과 싱가포르도 국가 차원의 총력전을 펴고 있다.
한국은 안방용 규제 개혁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제공되는 디지털 금융은 ‘정보기술(IT) 강국’인 한국에 절호의 기회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벤치마킹 모델로 꼽은 BTS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BTS의 성공은 한류 확산을 기반으로 멤버 7명 개개인의 역량과 가장 트렌디하고 높은 수준의 콘텐츠(음악과 춤), 과감한 해외 공략이 결합한 결과다. 이는 디지털 금융 산업에서 IT를 바탕으로 한 인재 및 스타트업 역량 강화, 수준 높고 창의적인 콘텐츠(상품 및 서비스), 글로벌 시장 전략 등으로 치환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1990년대 대중음악 시장의 규제 철폐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가능케 해 K팝 성장의 토양을 제공한 것처럼 디지털 금융 역시 우호적인 환경과 제도 정비가 필수다. 디지털금융 규제자유특구를 설치하고 규제 샌드박스를 개방해 국내는 물론 해외 핀테크 업체까지 혁신적 사업모델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는 테스트베드를 건설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9일 금융규제혁신위원회를 출범하고 금산분리, 비금융 정보 활용 등 전방위적 규제 개선 논의에 착수했다. 대부분 전통적인 금융 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한계다. 금융의 BTS란 구호를 제외하면 미래지향적 혁신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디지털 금융 중심지를 향한 새로운 로드맵을 마련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