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30만 년 전께다. 이 긴 세월을 학자들은 ‘문자를 가졌느냐’를 잣대로 두 시기로 나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인 선사시대와 문자와 함께 산 역사시대(기원전 3000년~현재)로. 선사시대에 비하면 역사시대는 찰나다. 30만 년을 24시간으로 환산하면 문자가 발명된 건 밤 11시36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모든 문명은 마지막 24분에 이뤄졌다. 지식을 축적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막강한 무기’를 손에 넣은 덕분이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 주변 지역)는 인류 최초의 문자(쐐기문자)를 낳은 곳이다. ‘모든 이야기의 원조’로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 함무라비 법전, 60진법, 도시의 개념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전시 초입에 나오는 4500년 전(기원전 약 2600~2350년) 점토판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문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도시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수로를 보수한 기록이 쐐기문자로 적혀 있다. 양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수로를 만든 덕분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고, 이는 곧 문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수로 덕분에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언제든지 끌어 쓸 수 있게 되자 식량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먹을 게 충분해지니 인구가 늘고 도시가 생겼다. 식량 생산 외에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분업과 전문화가 시작됐다. 이들은 물물교환을 했다. 시장경제가 생겨나고 돈의 흐름을 기록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문자가 발명됐다는 얘기다.
명품과 수입품을 좋아하는 세태도 요즘과 비슷하다. 당시 왕족과 부유층이 가장 좋아하는 귀금속은 금과 청금석.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잘 나지 않아 수입해야 하는 ‘희소성’ 때문이었다. 갖가지 장신구 유물들을 통해 이런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조각을 통해서는 대상의 사실적인 모습이 아닌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했다. ‘구데아왕의 상’이 단적인 예다. 통치자의 상징이었던 오른팔은 튼튼하게, ‘소통하는 이미지’를 위해 귀는 크게 만들었다. 요즘 SNS에 올라오는 ‘포샵 사진’들을 떠올리게 한다.
원통형 인장은 메소포타미아 조형예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새긴 다음 평면에 찍으면 글씨나 형태가 나타나는 2차원 방식의 요즘 도장과 달리 이들의 도장은 ‘2.5차원’이었다. 대리석, 뼈 등을 원통모양으로 다듬고 표면에 모양을 새긴 뒤 이를 축축한 점토판 위에 쭉 굴리면 문양이 나타나는 식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 등 정보와 함께 신을 그린 그림, 영웅이 괴물을 잡는 그림 등 장식을 넣었다.
전시장에서는 방해석 등 귀한 재료로 만든 ‘신에게 바치는 그릇’과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에 달던 황소머리 장식 등 예술품도 만나볼 수 있다. 기원전 700~600년 아시리아 제국의 정교한 부조와 컬러 벽돌 작품들도 시선을 잡는다. 전시장에 마련한 설명문과 관련 키오스크, 영상 자료 등을 참고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전시는 2024년 1월 2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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