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망치’와 ‘목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어느 코미디언 말이 한동안 회자됐었다. 이 말은 화자가 코미디언이었다는 차원에서 정합성을 갖는다. 코미디언은 익살스러운 말, 때로는 재치 있는 비약으로 사람들 웃기는 게 본업인 까닭이다. 코미디언이 아니면서 정색하고 이 말을 했다면 한 마디로 ‘미친 소리’한 것이다. 물론 화제의 그 코미디언이 앞뒤의 상황이나 전제조건을 세련되게 했더라면 좀 더 차원 높은, 아니 적어도 수준이 있는 개그가 됐을 것이다. 코미디언의 말이되, 코미디 장을 벗어나 정색을 하고 이런 선동을 했으니 다른 차원에서 씁쓸하게 웃겨버린 것이다.
요즘도 논란이 되는 ‘원가’ 문제를 보면서 잊힌 그 코미디언의 ‘웃픈 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아파트 원가 공개’ 운운하며 버젓한 공기업 대표까지 나서는 데서 표퓰리즘과 선동의 짙은 그림자를 보게 된다. 표퓰리즘이 아니라면 순진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마냥 순수한 것일까.
도대체 원가라는 게 있나. 무엇을, 어디까지를 원가라고 할 것인가. 개념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하고 선 긋기가 어려운 게 원가다. 더구나 이 세상에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는 게 주택일진대….
한 번 생각해보자. 유능한 변호사의 수임료에서 원가를 산정할 수 있을까. 정말 빼어난 의사나 약제사, 건강관리사의 의료나 치료, 생명을 좌우하는 건강 컨설팅에 원가를 책정할 수 있을까.
국내 굴지의 경험 있는 유능한 로펌 변호사들은 수임 사건에 대해 1시간당 80만원 이상의 비용을 청구한다. 요즘은 100만원 훌쩍 넘었을지 모르겠다. 33년째 기자로, 논설위원만 12년을 한 필자는 공휴일인 일요일 출근에 온 종일 일한 대가는 20만원 남짓이다. 이 양자 사이에 불공정이나 불공평, 아니 불의가 있다고 할 수 있나. 그냥 시장의 인건비 비용이 그렇게 형성됐다. 누가 설계한 것도 아니고, 강제한 것은 더욱 아니다. 변호사와 기자로의 선택은 당사자 각자가 자율적으로 했다. 인건비, 즉 보상도 각각의 소비자가 그렇게 한다. 소비자는 자발적으로 비용 지불 의사가 있는 고객이고,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시장이 그렇게 지불하는 것이다. 10분 진료로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유능한 의사의 의료 서비스 원가를 따질 수 있나.
논설위원의 서비스(사설과 칼럼, 나아가 신문 지면)가 아주 좋아, 그게 소비자(독자)가 기꺼이 비용을 더 지불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보상은 커질 것이다. 변호사도 돈 값(비용)을 못하면 수임료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사무실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수요-공급의 법칙이다. 가격제도, 수급이 내버려두면 균형을 잡아 가는 과정이 그렇고,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변호사들의 수임 세계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변호사의 수임료는 어떻게 형성되나 라는 것인데, 우스개 이상의 말이다. 변호사 수임은 상대방(의뢰인, 소비자, 고객)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가와 이 상대방이 얼마나 지불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절박해도 지불 능력이 없으면 수임료는 올라갈 수 없고, 지불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절박하지 않으면 거래가 안 된다. 전관예우니 하는 숱한 문제를 논외로 치면 꼭 맞는 말이다. 수요와 공급, 원가의 함수로 볼 때 그럴듯하다.
보상이 없는 사회에서 누가 밤낮을 잊으며 연구하겠으며, 원가 타령하는 곳에서 어떻게 혁신이 나올 수 있겠나. 다행인 것은 이런 희귀한 약도 1,2년 지나면 수 천 만 원대가 되고 10년쯤 지나면 수 백 만원이 되고, 더 지나면 그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일상에 퍼진 고혈압 약, 당뇨병 약, 항생제, 페니실린 등 인류역사상 명약중의 명약이 다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나. 이런 과정과 인류의 진화 회로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주택은 동일한 제품이 없는 인간 삶의 필수재다. 시간과 공간의 함수로 인류의 삶을 본다면 이 두 축과 가장 밀접한, 개인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절대적 공간이다. 여기에 원가를 들이댄다고 공급이 늘어날까. 정 원가를 따지고 싶다면 조달비용 개념으로 바꿔 더 싼 비용으로 더 많이 공급되도록 조달의 통로를 사방팔방으로 열어둘 일이다. 달리 말하면 이것도 규제개혁이다. 이 것 조차도 괜히 민간에 강요하고 간섭할 게 아니라 공공이 앞장 설 일이다. LH SH 같은 곳에서 말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