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나부낀다. 벽에 걸려 있어야 할 화포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73세 화가 비비안 수터의 아시아 첫 개인전을 찾은 관객은 설치미술과 회화 사이의 어딘가 낯선 풍경에 당혹감마저 든다. 그는 촉망받던 20대 젊은 시절에 모든 것을 버리고 과테말라 정글로 들어가 30년 이상 그림만 그렸다. 그의 그림은 정글의 빛과 바람과 풍경 그 자체를 거칠게 잡아 떼어낸 것처럼 강렬하다. 평범한 갤러리를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바꾼 ‘정글 화가’ 비비안 수터를 지난 15일 서울 강남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만났다.
이후 그는 자신을 옭아맸던 화풍을 해체했다. 가장 먼저 캔버스의 나무 틀부터 없앴다. 그는 더 이상 캄캄한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고정하지 않은 캔버스에 정글의 바람에 맡긴 채 붓질을 했다. 작품 속 재료는 풀, 화산재, 흙, 공업용 페인트와 같은 비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했다. 다람쥐와 개들이 다가와 캔버스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과테말라의 어둠도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밤새 손전등을 켜고 그림을 그렸고, 다음날 밝은 날에 다시 작업실을 찾아 놀라운 작품이 깃들어 있기를 기도했다. 그는 “내 작품의 가장 큰 모티브는 자연”이라며 “한 작품에 오랜 시간 공들이다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며 내 자신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30여 년을 세상과 단절됐고, 잊혀져 갔다.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든 사람은 큐레이터 아담 심치크다.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 미술관 쿤스탈레 바젤의 감독인 심치크는 예전 자료를 확인하다 우연히 1981년 ‘바젤의 젊은 아티스트 6인(6 Young Artists of Basel)’ 기록을 보게 됐다. 5명은 낯이 익었으나 비비안 수터는 미술계에서 잊혀져 아는 바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남미 정글에서 그를 만나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11년 30여 년간 정글에서 만든 작품이 세상에 공개됐다. 이전과 확 달라진 그의 화풍은 세상에 충격을 줬다. 당시 그의 작품을 본 화가들은 “그는 때묻지 않은 과테말라의 색을 정수로 추출하고 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수터는 유럽과 북미 유수의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2017년 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계의 올림픽인 ‘도큐멘타 14’ 전시에도 참여했다. 말 그대로 전 세계 미술계에서 ‘재발견’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위아래, 왼쪽 오른쪽, 앞뒷면이 없다. 가로로 그린 작품도 공간과 구성에 따라 세로로 설치하기도 한다. 모든 작품 이름은 ‘무제’로 별다른 제작연도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내 작품은 한번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숙성되듯 완성된다”고 말했다. 야외 공간에 걸릴 때 더욱 빛이 난다. 갤러리에서 숨죽이고 바라봐야 했던 회화를, 바람에 나부끼는 곳에서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이색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한국 관객들이 어떠한 정보 없이 온전히 작품을 감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제주도 일정이 가장 기대된다고 했다. 제주도의 풍광은 그의 마음에 어떤 색으로 새겨질까. 전시는 8월 19일까지.
방준식 기자 silv000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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