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에겐 큰 숙제가 있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유대 관계를 강화할 후계자가 필요했지만, 아들 카를로스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곧 아내마저 사망해 더 이상 후계를 이을 수 없게 됐다.
그러자 펠리페 4세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29살 어린 조카인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나와 재혼하기로 한 것. 이게 다가 아니다. 마리아나 공주는 펠리페 4세의 죽은 아들 카를로스와 결혼을 약속한 ‘예비 며느리’였다. 조카이자 예비 며느리와 결혼한 셈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는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작품에도 등장한다. 작품 속 중간에 걸린 작은 거울 속에 비친 두 인물이다.
<로열 패밀리>는 유럽의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온 로열 패밀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진정한 군주가 되고 싶었던 여왕> <왕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등을 낸 정유경 작가가 썼다. 저자는 각 가문의 성장과 쇠락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며 유럽 역사의 세계로 안내한다.
책은 유럽의 로열 패밀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합스부르크 가문, 프랑스 왕가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부르봉 가문, 강력한 러시아를 만든 로마노프 가문, 프로이센 왕가이자 독일 황제 자리까지 차지한 호엔촐레른 가문,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노버 가문, 북유럽을 통치한 올덴부르크 가문 등 모두 여덟 가문을 소개한다. 이들은 오랜 시간 유럽을 지배해 왔으며, 지금도 유럽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가문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장치는 결혼이었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는 “오스트리아가 세상을 통치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목표는 합스부르크 가문 대대로 내려왔고, 가문의 일원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결혼을 적극 활용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는 영토 확장을 위해 여동생인 마리아를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지배하고 있던 국왕 라요시와 결혼시켰다. 또 남동생 페르난트는 라요시와 남매 관계인 안나와 혼인하게 했다. 이 덕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은 헝가리와 보헤미아로 확대됐다.
이런 식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세력을 확대했다. 한때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었을 정도였다. 이들은 예술인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자처해 유럽 예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로마노프 가문도 합스부르크 못지않은 명문가다. 이 가문은 영화 속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어벤져스’에 나온 히어로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분)가 로마노프 가문 출신으로 나온다. 영화 속 이름은 나타샤 로마노프다. 로마노프 가문은 300여 년에 걸쳐 러시아를 통치했다.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인 사이에서 러시아는 유럽보다 아시아에 가까운 나라란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통치하면서부터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로마노프 가문에선 블랙 위도우처럼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표트르 대제가 후계 없이 사망한 이후 여제들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표트르 대제의 아내 예카테리나 1세는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됐으며, 이어 대제의 조카인 안나 이오아노브나도 황제 자리에 올랐다. 안나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됐다.
하지만 로열 패밀리의 영광은 시간이 흐르면서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독일제국의 마지막 왕위에 오른 빌헬름 2세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퇴위해 네덜란드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망명 생활 중에도 독일에 왕으로 복귀할 날을 기다렸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책은 이처럼 로열 패밀리의 주요 인물과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다만 지나치게 많은 인물이 등장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럴 땐 책에 그려진 가문의 계보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저자의 말처럼 “역사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열 패밀리에 소속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쌓여 거대한 유럽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로열 패밀리의 장대한 계보를 걷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사 뒤편에 숨은 흥미롭고 빛나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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