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국내 사망자 30만 명 중 4분의 3이 자신의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만성질환을 앓다가 중환자실의 생명연장 장치에 의지해 보지만, 극심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응급환자가 아님에도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할 ‘웰다잉(well-dying)’은 쉽지 않다. 2016년 제정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시행에 들어가면서 의미 없는 연명의료를 중단 또는 보류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하지만 현행법은 임종기 환자에게만 인공호흡기를 떼거나 심폐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가망 없기는 마찬가지인 말기 환자나 식물 상태 환자 등에겐 이런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말기 환자도 자신의 결정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게 하자는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이 지난 6월 15일 국회에 발의된 배경이다.
법안에선 의사조력자살을 ‘조력존엄사’로 표기하고 있다.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는 미국 몇몇 주의 법률에서 존엄사(Death with Dignity)란 용어를 빌려와 법안 명칭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결정과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으로 바꿨다. 거부감을 줄이려는 뜻이긴 하나, 엄연히 자살인데 존엄사라고 부르니 헷갈리는 측면이 없지 않다.
개정안 발의 직전인 지난 5월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도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윤 교수 역시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이 큰 차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한데 묶어 1000명에게 의견을 물었고, 응답자의 76.3%가 제도 도입에 찬성했다. 지난달 12일 발표된 한국리서치 설문에서도 의사조력자살 입법 찬성률이 82%에 달했다. ‘연명의료 중단·보류’에 머물러 있는 현행 법제도를 의사조력자살 허용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본격 논쟁은 이제부터다. 천주교 등 종교계와 의사협회 등 의료계는 우려와 반대 목소리를 잇달아 내고 있다. 낙후한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한 돌봄서비스) 인프라부터 개선해야 하는데, ‘자살’을 조장할 게 뻔한 입법을 앞세우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제1조에서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며,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두고 조력자살 찬성자들은 의미 없는 생명 지속을 단축해서라도 환자의 존엄을 지켜주는 게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자들은 생명을 단축하는 일은 건전한 사회윤리에 반하는 것이고, 환자의 이익도 사회공익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단, 연명의료 중단은 생명 단축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나 노인단체인 노년유니온의 고현종 사무처장은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10만 명당 46.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6배”라며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지 않으면 환자와 가족의 동반 자살, 간병 살인 등 고령화 사회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착한법 만드는 사람들’ 대표)은 “식물 상태 환자의 가족이 연명의료 중단을 병원에 요청했다가 거부당해 법적 다툼을 의뢰해온 경우가 많다”며 “의사조력자살 허용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일”이라고 했다.
안규백 의원은 2016년 윤영호 교수의 설문 때, 41.4%로 나온 안락사·의사조력자살 찬성률이 거의 2배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인식 변화에도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느냐는 얘기다. 그러나 설문의 적정성과 신뢰도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응답자들이 이 사안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답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에 대해 안 의원 등은 의사조력자살을 도입한 네덜란드 스위스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서 특별히 생명 경시 풍조가 심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또 말기 환자로 국한하는 등 엄격한 요건을 만들면 큰 문제 없이 시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개정 법안이 과연 그런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개정안은 △말기 환자 △수용하기 우려운 고통 발생 △본인의 희망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고, 심사위원회 심사를 통과하면 의사조력자살이 가능하도록 했다. 조력자살을 도운 담당의사에게는 형법상 자살방조죄 적용을 배제한다. 만약 담당의사가 돕기를 거부하면 해당 의료기관의 장이 담당의사를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거부한 의사를 해고하거나 다른 불리한 처우를 하면 안 된다. 법안의 주요 골자는 이게 전부다. 이 밖에 기록 보존, 정보유출 금지 등을 정하고 있지만, 절차와 요건이 간략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의사협회는 자살방조죄 면책이 된다고 해도 의사들이 윤리적 문제와 민사 문제에 시달릴 수 있는 문제를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의사조력자살 합법화 이슈는 찬반 쪽 논리가 정연해 판단이 쉽지 않다. 우선은 사회적 논의가 좀 더 필요하고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는 의료계 주장에 공감이 간다. 제도가 실효성 있게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미리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놓지 않은 경우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을 평소 원했다는 사실을 가족 2인 이상이 진술하거나 가족 전원의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절차가 까다롭다 보니 현장에선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도록 하는 기존의 간단한 의료절차로 대체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반면, 말 못할 고통을 이어가는 말기 환자와 가족들 사정을 들어보면 의사조력자살의 필요성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고귀한 죽음을 향한 공론의 장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현재 법안만 발의됐을 뿐, 법안 심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오는 24일 열리는 관련 국회 토론회에 관심이 쏠린다. 해외 입법 사례 등과 비교해가며 관련 법제를 발전시킬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존엄사
삶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지켜주자는 존엄사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등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 또는 보류하는 결정이 가장 낮은 단계다. 이보다 적극적인 존엄사가 의사조력자살이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독극물을 환자 본인이 원하는 때에 복용 또는 투약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적극적인 존엄사로는 환자가 사망에 이르도록 의사가 직접 독극물을 투여하는 안락사가 있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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