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 이제 그만 이 비행기에서 내리게 해주세요 [리뷰]

입력 2022-08-03 15:02   수정 2022-08-03 15:03


극장을 항공기 내부처럼 꾸며놓은 것도 아닌데, 영화를 보는 내내 재난을 마주한 비행기에 타고 있는 듯하다. 빈틈없는 연기력의 향연, 재난 상황에 대한 디테일한 표현, 그 안에서 얽히고설킨 여러 인간 군상이 어우러져 140분의 러닝타임을 꽉 채운다. 영화 말미 "내리고 싶다"는 마음마저 드는, 리얼리티가 인상적인 '비상선언'(감독 한재림)이다.

3일 개봉한 '비상선언'은 사상 초유의 테러로 항공기가 무조건적 착륙을 선포한 상황 속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각각의 사연으로 비행기에 오른 승객들, 분투하는 기장과 스튜어디스들, 지상에서 이들을 구하려는 경찰, 고민하는 정부까지 다각적인 시선이 담긴다.

어딘가 모르게 조용한 집안 분위기. 딸에게 물으니 아내가 하와이로 휴가를 떠났다고 한다. 주방을 살펴보니 커다란 솥에 곰국이 한가득 담겨있다. 보름은 거뜬히 넘길 양이다.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껏 들뜬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후 출근해 접한 건 비행기 테러 예고 영상. 아뿔싸! 아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에 테러 용의자가 탑승했다는 걸 알게 됐다. 베테랑 형사팀장 인호(송강호 분)의 눈빛이 흔들렸다.

재혁(이병헌 분)은 비행기 안에서 연신 술을 들이켰다. 불안감을 느끼는 그의 곁엔 어리지만 차분하고 똑 부러지는 딸이 있었다. 재혁은 딸의 치료를 위해 비행공포증에도 불구하고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공항에서부터 딸에게 말을 걸어오던 낯선 남성이 같은 비행기에 탄 게 연신 신경 쓰였다.

비행기 안의 평화가 깨진 건 한 탑승객이 사망하면서부터다. 이내 연쇄적으로 사람들이 이상증세를 보이며 테러라는 걸 알게 되면서 항공기 내부는 혼돈에 빠진다. 그렇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승객들을 실은 채로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려는 생존 분투가 시작된다.

영화는 초, 중반 상당히 속도감 있는 전개로 관객들을 강하게 극으로 끌어들인다. 각각의 사연을 품고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르는 탑승객들과 의문의 남성 진석(임시완 분)의 모습이 교차하며 빠르게 스토리의 핵심으로 치닫는다.

일반적으로 항공 재난이라 하면 하이재킹(운항 중인 항공기를 불법으로 납치하는 행위)을, 테러라면 총기나 흉기를 이용한 걸 떠올릴 테지만, '비상선언'은 화학물질을 통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가져왔다. 알 수 없는 죽음, 그 원인을 알아가는 과정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극단적 공포감 이상의 두려움을 준다. 특히 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긴 시간 고통 받는 현시점과 맞닿아 더욱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든다.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시각적 연출은 '비상선언'의 최대 강점이다. 한재림 감독은 극한의 사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실제 거대한 크기의 비행기 세트를 구현, 이를 360도 회전시킬 짐벌을 촬영에 투입했다. 크고 작은 터뷸런스(난기류)를 표현하는 것부터 비행기가 추락하며 빙글빙글 도는 상황까지 그야말로 '실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데 주력했다. 비행기가 360도 회전하며 아수라장이 된 기내를 표현한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손에 땀이 쥐어지는, 숨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비상선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요소다. 송강호는 형사팀장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재난 앞에서 직업적·인간적 요소가 모두 쏟아져 나오는 인호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지상과 상공이 분리되어 보여지는 영화이고,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비행기에 탑승해 있어 자칫 두 공간이 따로 놀 수 있지만 송강호는 이를 매끄럽게 연결해낸다. 연기력은 두말할 것이 없다. 여기에 이병헌,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은 물론 기내에 있는 모든 배우들이 명연기를 펼친다.


임시완은 '비상선언'의 보물이다. 테러리스트를 연기하는 그의 눈빛은 차갑다 못해 서늘하다. 잔뜩 힘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힘을 빼고 캐릭터의 포인트를 잘 짚어낸 영리한 '강약 조절 연기'가 인상적이다.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최고, 최적의 캐스팅이다.

다만, 뒷심이 부족한 전개는 다소 아쉽다. '비상선언'은 단순히 재난 상황 속 장대한 생존 과정을 비추는 영화가 아니다. 앞서 한 감독은 재난 속 발견하는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사회공동체에 대해, 소중한 가족과 이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 메시지 전달에 너무 몰두한 탓일까. 결말에 닿기까지 여러 차례 반전을 거듭하는데, 이는 오히려 한껏 상기된 관객들의 긴장감을 늦추며 몰입도를 떨어트린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입장을 가지고 재난을 대하는 인간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주는데, 이 역시 답답하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다. 국토부 장관 숙희 역을 맡은 전도연의 연기가 약간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이 지나고 나면 어딘가 멍한 기분이 드는 '비상선언'이다. 극 말미 여러 감상이 오가는 가운데 드는 생각은 "빨리 이 비행기에서 내리게 해주세요". 너무 리얼한 탓에 진이 다 빠져서, 혹은 후반부 전개에 지쳐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항공 재난 영화에 한 획을 그을 요소가 많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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