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 년간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일하며 금속활자를 연구해온 이재정 학예연구관은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활자는 구텐베르크의 활자와 개발 목적부터 달랐다”고 설명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는 최대한 책을 많이 찍어내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고려·조선시대 활자는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에게 통치 이념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됐다는 것이다. 이 연구관은 “서양 금속활자만큼은 아니지만 고려·조선 금속활자도 역사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고, 그 가치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이 연구관은 <활자본색>에서 금속활자가 한국사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책은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만 헤아려도 85만 개. 지식인들이 볼 책을 찍어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다. 저자는 “왕마다 자신만의 금속활자를 가지고 싶어 했고, 왕권이 강할수록 금속활자를 많이 만들 수 있었다”며 “사치를 금기시했던 조선 왕실에서 활자는 왕이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금속활자 중 대표 격이 지난해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갑인자’다. 갑인자는 1434년 세종의 명으로 중국의 성인들 및 둘째아들 진양대군(훗날의 세조)의 글자체를 본떠 만들었다. 저자는 “금속활자의 재료인 구리는 당시만 해도 귀금속에 속했고, 도난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났다”며 “금속활자들이 땅에 묻혀 있었던 건 누군가 훔쳐 숨겨뒀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오랫동안 금속활자를 연구해온 전문가답게 저자는 조선시대 활자와 인쇄술에 대한 지식을 다방면으로 풀어 놓는다. 조선시대에는 오탈자에 대한 처벌이 가혹했는데, 정조는 오탈자를 냈다는 이유로 가장 아끼던 신하인 정약용을 파직하기도 했다. 지금은 ‘진지함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필체인 궁서체가 정작 조선시대에는 세련되고 여성적인 이미지였다는 것도 재미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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