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나가 코로나19 백신을 내놓으면서 유전물질인 메신저리보핵산(mRNA)을 약으로 만드는 시대가 열렸다. 스테판 방셀 모더나 최고경영자(CEO)는 이 신약 개발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모더나라는 기업을 만든 인물은 따로 있다. 모더나 회장을 맡고 있는 미국 바이오 전문 벤처캐피털(VC)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 CEO 누바 아페얀이다.
모더나는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이 키운 80여 개 기업 중 하나다. 그는 2011년 프랑스 대형 진단업체 비오메리외 CEO였던 방셀을 설득해 모더나 경영을 맡도록 했다.
아페얀 회장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1989년 생명공학 장비업체인 퍼셉티브를 창업했다. 1998년 연매출 1억달러 규모로 회사가 성장하자 그는 퍼셉티브를 장비업체인 퍼킨엘머에 3억6000만달러에 매각했다. 이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1999년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을 설립했다.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은 초기 투자에 방점을 둔 일반적인 VC와는 사업모델이 조금 다르다. 아페얀 회장은 사업화할 만한 아이디어를 직접 뽑아낸다. 이후 자체 연구 인력을 통해 이 발상의 사업화 가능성을 검토한 뒤 관련 지식재산권을 확보하고 인재를 영입한다. 창업을 주도할 뿐 아니라 모든 투자 단계에서 자금 조달을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투자 기업이 기업공개(IPO)를 할 때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 지분율이 50~60%에 달한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방셀 CEO는 아페얀 회장을 ‘르네상스맨’이라고 부른다. 과학자이면서 자본가와 사업가로서 면모를 두루 지니고 있다는 점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다재다능한 인물들이 활약했던 르네상스기 인재상과 맞아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아페얀 회장은 사업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독특한 발상법을 활용한다. 그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를 먼저 떠올린 뒤 이 미래상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한다. “현실을 진보시키기보다는 미래를 후퇴시켜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아페얀 회장은 플랫폼 형태의 사업모델을 갖춘 바이오 기업을 육성하는 데 승부를 걸었다. 지금이야 플랫폼 경제가 익숙해진 시기지만 플래그십파이어니어링 사업 초기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mRNA 같은 플랫폼보다는 특정 소수 약물을 상업화하는 사업모델이 대세였다. 여기에 닷컴 버블로 바이오 산업에 대한 관심도 시들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플랫폼 바이오’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실패를 우려하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분야라면 그 어떤 혁신이라도 가치가 있다”는 팩커드의 조언이 힘이 됐다.
지난달 기준 모더나가 개발 중인 신약후보물질 수는 46개에 이른다. mRNA를 처음부터 신약 개발 플랫폼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면 창업 13년차 기업이 이렇게 많은 후보물질을 갖는 건 불가능했다는 평가다. 오미크론 변이 대응용 백신을 포함해 임상 마지막 단계인 3상에 이른 백신만 4개다. 아페얀 회장은 “모더나의 가치는 백신이 아니라 플랫폼에 있다”며 “46개 약물 후보 중 일부는 성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페얀 회장은 감염병 대응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달 아프리오리바이오를 창업했다. 이 바이오 스타트업의 CEO를 직접 맡았다. 아프리오리바이오는 실험실에서 바이러스 변종 수백만 개를 만든 뒤 이 변종에 결합하는 항체를 탐색하기로 했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해 변종별 위험도를 파악한다. 특정 변이가 유행한 뒤에 뒤늦게 백신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유행할 변종에 대응할 수 있는 백신 후보군을 먼저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아페얀 회장은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여기는 곳에 사업 기회가 있다”며 “아직 출현하지 않은 바이러스 변종에 대한 대응은 미래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인류를 보호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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