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사교모임에 갔더니 모두가 <모비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그 소설을 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읽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어요."
우디 앨런의 영화 '젤리그' 속 주인공의 고백이다.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모비딕>은 그만큼 대중적인 고전이다.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박은빈 분)은 고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데, 향유고래에 대해 설명하기 전 "<모비딕> 읽어 보셨습니까?" 하는 질문부터 던진다.
<모비딕>은 해양문학의 정수, 미국 대표 소설로 꼽힌다.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고래와 인간의 치열한 사투를 그렸다.
선장 에이해브는 흰 향유고래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물어뜯긴 후 모비딕을 향한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이끄는 포경선 피쿼드 호에 선원으로 오른 화자 이슈메일은 침착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한다. 이처럼 소설은 자연과 인간, 감정과 이성 등 대립적 가치를 동시에 보여준다.
600쪽이 넘는 <모비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책이다. 풍부한 상징으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고래 모비딕은 에이해브 선장에겐 인간을 해하는 악의 화신일지 몰라도, 누군가의 눈에는 문명인에게 위협 받는 자연을 의미한다.
<모비딕>을 국내 처음으로 완역한 김석희 번역가는 이 책 번역 후기에서 “복잡 미묘하게 잔물결이 이는 해수면처럼 보는 사람의 눈높이에 따라 다양한 빛을 내는 소설”이라며 “청년, 장년, 노년에 세 번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1819년 뉴욕에서 태어난 멜빌은 포경선 선원으로 일한 경험을 담아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은 고래기름으로 기계를 돌리던 19세기 미국 사회의 초상화다.
거친 바다로 나아가는 포경선은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열망과 욕망을 보여준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당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피쿼드 호는 온갖 인종이 뒤섞인 ‘용광로’다. 그런데 키를 잡은 선장과 항해사는 백인, 고래사냥의 최전선에서 천대받는 작살잡이는 유색인종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모비딕에 대한 복수심과 정복욕에 불타던 에이해브 선장은 작살로 모비딕을 명중시키지만 그 작살에 묶인 밧줄에 감겨 바다에 빠져 죽는다.
성경 역시 <모비딕>를 이해할 때 중요한 키워드다. 주인공 이슈메일의 이름은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에서 왔다. ‘쫓겨난 자’, ‘떠도는 자’라는 뜻처럼 이스마엘은 사막을 떠돌고 이슈메일은 망망대해를 헤맨다. 에이해브 선장은 ‘열왕기상’에 나오는 폭군 ‘아합’을 떠올리게 한다. 모비딕은 ‘욥기’ 속 바다 괴물 ‘레비아탄(리바이어던)’과 겹친다.
고래라는 소재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고래는 물 속에서 폐로 숨쉬는,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품고 있는 동물이다.
지금이야 미국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동안 <모비딕>은 난파선처럼 버려져 있었다. 저자 멜빌은 살아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신문에 짧은 부고 기사가 실렸는데 그마저도 <모비딕>의 철자가 잘못 표기됐을 정도다. 멜빌 사후에 레이먼드 위버라는 유명 평론가가 극찬하면서 소설이 재조명됐다.
국내에는 여러 출판사와 번역으로 출간돼있다.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스타 번역가’ 김석희, 시인 황유원 등의 번역본이 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어니스트 헤맹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포경선 에식스호의 실화를 다룬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도 함께 감상할 만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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