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W' 없는 최초의 도큐멘타…유럽 미술계 논란의 중심을 가다

입력 2022-08-11 16:35   수정 2022-09-09 00:03


독일 중부 헤센주(州)의 소도시 카셀. 20만 명이 사는 이곳에는 5년마다 한 번씩 100만 명의 사람이 몰려든다. 비행기와 열차를 타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단 하나. 한여름에 펼쳐지는 100일간의 예술 축제 ‘카셀 도큐멘타’를 만나기 위해서다. 동시대의 가장 실험적인 예술을 압도적 스케일로 경험할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일부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며 페스티벌을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67년째 전위적 작품을 선보이며 세계 미술계를 이끌어온 카셀 도큐멘타는 그 역사만큼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사태는 카셀 도큐멘타15(D15) 위원회가 인도네시아 현대미술 아티스트 그룹 루앙루파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하면서 촉발됐다. 백인 남성, 서양 중심의 미술 축제라는 비판을 의식해 사상 최초로 동양인 예술 그룹을 예술감독으로 선임한 결정은 거센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예술계의 시선을 한껏 빨아들이는 카셀 도큐멘타를 직접 찾았다.
첫 아시안 예술감독… ‘3W’ 없는 논란의 카셀 도큐멘타
D15 위원회는 ‘3W 없는 카셀 도큐멘타’를 설계했다. 백인(Being White), 서양 중심주의(Western), 세계적인 아티스트(World famous)에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인도네시아에서 마을 공동의 헛간을 뜻하는 ‘룸붕’을 테마로 남반구 전역의 현대미술가들을 카셀로 끌어모았다. 행사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지구의 북반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예술계의 시계를 남반구로 돌리겠다는 의지에서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작가 1000여 명이 32곳에 걸쳐 작품을 펼쳐냈다.

혁신을 택한 결과였을까. 6월 18일 개막과 동시에 미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인도네시아 예술그룹 타링 파디의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작품이라는 비판에 휘말리면서다. 작품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고, 정치인과 총리까지 나서서 D15의 작품 선정 과정 등을 비판했다. 카셀 도큐멘타는 독일 주정부가 전체 예산 4200만유로(약 573억원)의 절반을 부담한다. 해당 작품은 곧 철거됐지만 이후 몇몇 작품에서 이스라엘 국가정보기관인 모사드를 상징하는 문양, 유대인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상징 등이 추가로 발견됐다. 개막 한 달 만인 지난달 17일 카셀 도큐멘타의 사무총장(사빈 쇼만)이 사임했다.
모두를 위한 학교가 되다

지난 7일.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100일간의 전시장’은 평화와 진지함을 대부분 되찾은 모습이었다. ‘예술의 곡식들을 한자리에 모아 모두를 친구로 만든다’는 목표를 다시 되새기며 관람객들은 작품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대한 하프파이프 안에서 누구나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작품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체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더불어 사는 지구에 대해 고민하면서 카셀의 여름을 지냈다.

D15의 주 전시장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은 모두를 위한 학교이자 지성의 광장으로 변했다. 1779년 문을 연 이 미술관의 출입구 기둥은 루마니아 화가 댄 퍼잡스키가 마치 어린아이가 칠판에 낙서하듯 장식했다. ‘나는 이국적이지 않아, 난 지쳤어(I AM NOT EXOTIC, I AM EXAUSTED)’ 등의 문구로 환경 문제, 인종차별, 세계화의 어두운 단면들을 상징하는 메시지를 거침없이 전했다.

잃어버린 원주민의 땅, 망가지고 있는 환경,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는 미술관 1층의 거대한 교실을 채운 화두였다. 작가들은 버려진 박스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친환경 예술작품을 곳곳에 배치했다. 관람객들도 유치원 미술시간처럼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이거나 가구를 재조립해볼 수 있었다. 호주 원주민 운동가 리처드 벨의 저항 회화는 백인들의 탄압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대형 작품들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흑인, 히스패닉이 말하다
D15의 시작인 도큐멘타홀은 아프리카 작가 그룹 ‘와주쿠 아트 프로젝트’가 만든 작품들로 채워졌다. 케냐 나이로비 빈민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녹슨 철판 슬레이트 패널 복도를 통과하면 버드나무로 만든 둥지(감옥) 안에 갇힌 사람 조각이 사막화한 땅을 내려다보는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아프리카 주민들이 집에서 쓰는 칼과 생활용품으로 아치형 패널을 만든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쿠바 작가그룹 ‘인스티튜도 데 아르티비스모 한나 아렌트’의 작가 듀오 어네스토 오로자와 타니아 브루게라는 지난 60년간 정부로부터 탄압받은 쿠바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제작해 나무 구조물에 걸었다. 이 전시관의 하이라이트는 태국 작가그룹 ‘반 누르그 컬래버러티브 아츠 앤드 컬처’가 만든 스케이트보드장. 스케이트보드장 위를 누구나 질주하게 만든 하프파이프의 배경엔 일상의 사물들을 새롭게 보는 ‘사물의 의식’ 설치 작품과 다양한 문화 속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넣은 벽화가 가득했다. 예술감독을 맡은 인도네시아 루앙루파 그룹은 ‘프로젝트 아트 워크(영국 터너상 후보에 오른 미술관)’ ‘FAFSWAG(뉴질랜드 원주민 퀴어 예술가 집단), ‘오프 비엔날레 부다페스트(초국가적 현대 미술관 창설을 상상하는 그룹)’ 등과 함께 작업했다.

정치적 이슈로 초반 진통을 겪었으며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상 작품이 많아지고 전시 규모가 축소됐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D15의 관심은 적지 않았다. 오는 9월 25일까지 이어지는 D15의 첫 50일간 방문객 수는 41만 명. 코로나 팬데믹 이전이던 지난 카셀 도큐멘타(2017년)의 같은 기간 기록(44만 명)과 맞먹는다. D15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조금 불편한 것들을 예술로 만드는’ 100일간의 항해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카셀=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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