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광장이냐가 관건이겠지만, 광장에 대한 호불호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광장이라면 고대 그리스 아고라와 바로 연결시키며 대중민주주의의 절대 공간으로 떠받드는 이들도 있다. 반면 일탈의 방종 공간, 우중정치 거점, 심지어 소수파의 선동이 난무하는 치외법권 지대로 보는 시각도 엄존한다. 열린 공간에서 열린 사회의 적이 발호한다고 우려하는 관점이다. 로고스와 파토스의 인간 유형대로, 광장에 대한 시각도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광장이 ‘정치 공간’이 되면 이성이 스며들 여지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광장과 상대 개념으로 ‘닫힌 공간’이 명상과 성찰, 학습과 성숙의 장인 것과 비교된다. 작가 최인훈의 ‘광장론’은 이런 접근에 일찍이 탁견을 제시했다. 그는 기념비적 소설 <광장>에서 드넓은 평양의 광장을 내세우는 북한을 ‘광장의 사회’로 묘사했다. 개인 생활과 결부할 때 이 광장은 집단적 삶의 상징이 된다. 성찰적 삶, 자유의 삶, 개인적 삶을 담보하는 가려진 공간이 아예 없는 사회는 지옥일 것이다.
신장개업한 광화문광장을 보며 21세기 도시 광장의 기능과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21개월간 815억원을 들여 새로 단장한 서울의 심장 같은 이 공간이 성숙한 사회로 가는 데 도움이 될까,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에 독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게 기우 이상의 두려움이다. ‘직접민주주의 성지론’이 나오며 대중독재의 무대, 궤변론자들의 선동 경연장이 되지는 않을까. 행여 그렇게 되면 지금 수준의 시민의식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 될 것이다. 야간의 촛불바다로 집단적 파토스가 극대화되는 격정의 공간이 되든, 그 반대 진영 애국파의 고지전 성지가 되든, 정치 공간화는 후유증을 남긴다. 가벼운 경제 공간, 문화와 휴식의 장을 넘어서지 않는 게 좋다. 안 그래도 정치 과잉의 한국 사회다. 광화문이 여의도를 무력화시키는 거리 정치의 아성화를 거듭 경계한다.
그런 우려 때문인가. 관리자인 서울시가 여기서 대규모 시위나 집회는 안 된다는 방침을 세우기는 했다. 바람직하다. ‘시민의 건전한 여가 선용과 문화 활동’에 한하는 서울시 조례는 사실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정치만능 풍조에서 이 규정이 지켜질까. 그동안도 이런 조례가 없어서 극한의 정치 공간이 됐던 게 아니었다. 집회의 신고 따로, 실제 내용 따로로, 세 과시의 정치적 시위장이 돼버렸다. 법 만들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국회의 ‘입법 리스크’도 변수다. 책임은 뒷전인 채 집회·시위·표현의 자유만 기형적으로 강조하는 날림 법을 만들어 시 조례를 무력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선동과 포퓰리즘, 일탈 같은 광장에 내재된 ‘비이성·반민주 코드’가 실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광장의 역기능과 독이 발현되지 않게 하려면 제도로서의 대의민주주의가 정상 가동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명한 선거, 공당을 자처하는 민주 정당의 제 기능, 모범적 대의체제로서의 의회 역할이 그래서 절실하다. 현재 수준에서는 이것 외에 어떤 민주주의를 외친들 사이비 위장 민주라는 시민의 자성과 공감대도 필요하다. 열린 정부, 상식의 언론, 냉철한 학계, 지혜의 종교계가 자기 구실을 다 하는 다원 사회의 작동은 그다음이다.
국가 1번지의 드넓은 세종대로가 2009년 이후 끝없는 공사판이 되면서 사업 내용이 이리저리 변해온 과정은 돌아봐도 어지럽다. 정파가 다른 전·현직 시장과 시장대행까지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어온 과정은 도시행정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도 남는다. 좋은 광장으로 가꿔야 할 서울시의 책무도 그래서 크다. 그럼에도 문화와 관광, 휴식·여유의 탈정치 품격 공간으로 정착 여부는 결국 성숙한 시민 역량에 달렸다. 누적된 개혁과제나 한국형 거대담론에 비하면 광장 문제는 한가한 사안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문제다. 대한민국 사회의 한 단면이요, 미래 한국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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