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을까요? 미술사 책들은 항상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라스코 동굴벽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구석기인들이 1만년도 더 전에 동굴에서 그린 그림들이지요.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지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로, 여러 동굴에 퍼져 있는 그림 중에서는 4만년 된 그림도 있습니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프랑스 남서쪽의 몽티냑 마을 인근 동굴에서 발견됐습니다. 1만7000~1만9000년 전 그린 것으로 파악됩니다.
보시다시피 구석기인들의 그림 실력은 탁월했습니다. 돌 깨고 나무 열매나 주워먹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죠. “현대미술보다 보기 좋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잘 그렸는지, 1879년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스페인의 사우투올라(1831~1888)가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발견했을 때 고고학계는 “거짓말이라도 성의껏 하라”며 빈정거렸습니다. 동네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그렸다는 헛소문도 돌았죠. 조롱과 질시를 퍼붓던 학계는 사우투올라가 죽은지 14년이 흐른 1902년에야 발견을 인정합니다.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그림을 잘 그렸던 걸까요. 배운 것도 없고, 먹고 살기도 바빴을 텐데 그림을 왜 그렸을까요. 지난 주말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 마당에 수만년 전 일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죠. 그래도 여러 고고학·미술사가들의 주장 중 정설로 취급받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한번 살펴보시죠.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사학자이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의 저자로 유명한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는 “구석기인들이 개념적 사유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뭘 몰랐기 때문에 잘 그릴 수 있었다”는 건데요. 차근차근 풀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보통 뭔가를 볼 때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샅샅이 훑지 않습니다. 특별히 눈에 띄거나 평소에 신경썼던 점만 확인하고 넘어가지요. 정보 처리를 빠르게 하기 위해섭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여겨 봤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크게 그리고, 제대로 안 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작게 그리지요. 아는 대로 그리는 겁니다. 여기 13세기 영국인이 그린 박쥐 그림이 그런 예입니다. 박쥐는 다리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박쥐의 본질을 ‘쥐 같은 얼굴’과 특징적인 날개로 파악한 거죠.
반면 구석기인들은 이런 식으로 본질을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는 게 곰브리치의 설명입니다. 본질을 요약하는 최적화 과정을 거치지 않다 보니 효율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역설적으로 상대방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는 겁니다.
1만년 후 이집트인들이 그린 동물 그림들을 보면 이런 설명이 좀 더 실감이 나실 겁니다. 사실성으로 보면 구석기 동굴벽화만 못합니다만, 곰브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지적 활동 수준은 훨씬 높습니다. 고양이가 채찍을 들고 기러기들에게 일을 시키는 그림, 고양이들이 쥐를 극진히 대접하는 그림 등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정치·사회상을 꼬집은 것으로 분석됩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뭐 이런 뜻이지요.
웃음을 주기 위해 그린 유머러스한 그림들도 있습니다. 사자와 가젤이 당시 유행하던 보드게임(세네트)을 하고 있네요. 유머도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이죠. 지나치게 ‘업’ 돼 보이는 사자의 표정과 뒤쪽에서 일하는 듯한 개의 씁쓸한 얼굴이 재미있는 대비를 이룹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뭐가 그리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돌았겠느냐”는 반박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구석기인들의 일상생활은 꽤 괜찮았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나무 열매나 잡아먹을 동물이 충분한 지역에만 살았습니다. 해가 뜨면 나가서 열심히 사냥하거나 채집 활동을 하고, 먹을 만큼 먹은 뒤 나머지는 동굴로 싸와서 푹 쉬면 됐습니다. 냉장고가 없으니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저장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일할수록 맹수와 마주치거나 발을 헛디뎌서 다치거나 죽을 위험만 늘어나는 환경이었죠.
구석기인들은 1주일에 평균 20시간 정도를 일하고 하루 2000kcal정도를 먹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근무 시간은 적고 남는 시간은 많고…. 변변한 놀잇거리도 없던 시절, 이들은 그림이라는 고상한 취미 활동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훨씬 나아 보이죠.
물론 ‘일상 생활’에 한정했을 때 얘깁니다. 그때는 맹수에게 잡아먹힐 확률, 벼락맞아 죽을 확률, 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았으니까요. 무엇보다도 15세가 되기 전 사고나 병으로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습니다. 일단 어른이 되고 나면 70세까지 사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릴 때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평균 수명은 25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구석기인들에게 그림은 사냥을 더 잘하기 위한 ‘교보재’였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라스코 동굴벽화 이곳저곳에서는 주먹도끼나 창을 맞은 자국들이 관측됩니다. 일종의 연습용 과녁으로 썼다는 얘기죠. 한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사냥감의 세세한 특징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구석기인들이 주로 그렸던 건 들소고, 정작 이들이 먹었던 건 훨씬 사냥하기 쉬운 순록이었다는 사소한 구멍이 있긴 하지만요.
‘주술적 목적’은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종교적 의식을 하면서 사냥이 잘 되기를 바란 거지요.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대부분 천장에 그려져 있습니다. 천장을 향해 창던지기 연습을 잘못 했다가는 큰일나겠죠. 사냥용으로 보기 어렵단 얘깁니다. 재미로 그렸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천장에 그림을 잘 그리려면 아마 누군가가 가까이서 횃불을 비춰주어야 했을 겁니다. 내가 재밌자고 다른사람에게 뜨거운 횃불을 밑도 끝도 없이 들고 있으라고 하기는 쉽지 않죠.
어쩌면 이 모든 이유가 다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심심해서 그림을 그려보고, 그러다 보니 더 잘 그리게 되고, 짓궂은 누군가가 그림에 돌을 던져 봤다가 ‘연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특별히 잘 그린 그림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풍습도 생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사진만 봐서는 ‘이게 왜 그림이야?’ 싶죠. 연구팀은 이를 의식한 듯 친절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일단 이 무늬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린 게 확실하다. 암석 표면을 먼저 문질러 부드럽게 한 뒤, 뾰족한 도구로 그린 흔적이 발견됐다. 그림 옆에도 여러 비슷한 모양이 새겨진 점토 조각 등 물건들이 있었던 걸 보면, 이건 뭔가를 뜻하는 무늬다. 즉 이건 ‘상징’을 그린 추상화다.” 이 말이 맞다면 앞서 언급한 곰브리치의 설은 틀렸다는 얘기겠죠. 아니면 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동굴에 살던 몇몇이 예외적인 천재였을 가능성도 있고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 타이틀의 주인도 자꾸만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 1등은 지난해 초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입니다. 멧돼지 등 동물 그림과 함께 일종의 스텐실 기법으로 표현한 손바닥(이런 무늬는 세계 곳곳의 동굴벽화에서 발견됩니다) 등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요. 이전 1등은 2014년에 발표된 마로스 동굴의 ‘손바닥 그림’(3만9900년 전)이었고요.
앞으로도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은 계속 바뀔 겁니다. 하지만 몇만년 전 사람들이 그림을 그린 정확한 이유와 사정이 뭐든 간에, 사람의 본성에는 ‘예술 본능’이 숨어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