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면 딱이다. 세계 최강 골퍼들이 겨루는 미국남자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통산 5승을 거둔 ‘오렌지보이’ 리키 파울러(34·미국)가 파4홀에서 9번 만에 홀에 공을 넣었다. 더블파를 하면 그 홀에선 더 이상 점수를 추가하지 않는 아마추어와 달리 프로는 ‘뒷문’을 열고 치다 보니(공을 홀에 떨굴 때까지 점수를 계속 더하는 것) 이름도 생소한 퀸튜플보기(quintuple bogey, +5타)의 주인공이 됐다. 파울러는 이 홀에서 무너지며 ‘쩐(錢)의 전쟁’으로 불리는 페덱스컵 플레이오프 2차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
파울러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골퍼 중 한 명이다. 2011년 한국오픈에서 프로 데뷔 첫승을 올린 덕분에 그를 응원하는 한국 골프팬도 많다. 2019년 2월 웨이스트매니지먼트피닉스오픈에서 우승하면서 PGA 투어 통산 5승, 세계 랭킹 4위까지 올랐다. 오렌지색 옷에 힙합가수들이 즐겨 쓰는 스냅백 모자를 쓴 그에게 팬들은 오렌지보이, 필드의 패셔니스타란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2020년 찾아온 슬럼프는 길고도 깊었다. 세계 랭킹이 추락하자 US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별도로 지역예선을 거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가 페덱스컵 1차전에 출전한 건 운이었다. 파울러는 페덱스컵 랭킹 125위까지 출전하는 1차전에 125위로 턱걸이했다. LIV골프로 이적한 선수들이 페덱스컵 랭킹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면, 그는 TV로 동료들의 경기를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파울러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살리기 위해 기를 썼다. 3라운드 17번홀까지는 괜찮았다. 4언더파로 이날 경기를 시작한 그는 17번홀까지 버디 4개, 보기 1개로 3타를 더 줄이며 이번 대회 성적을 포함해 페덱스컵 랭킹 상위 70명만 나갈 수 있는 2차전 출전을 거의 잡았었다.
거기까지였다. 마지막 18번홀(483야드 파4홀) 티잉 에이리어에서 날린 티샷이 그린 옆 해저드에 빠졌다. 벌타를 받고 드롭한 세 번째 공 역시 해저드에 빠졌다. 파울러는 해저드를 피하기 위해 드라이버 대신 아이언을 들었다. 해저드는 피했지만, 이번엔 쇼트게임이 문제였다. 어프로치에서 실수가 나오며 일곱 번째 샷 만에 그린에 공을 올렸고, 퍼트도 비껴가며 9타로 홀 아웃했다. 퀸튜플보기로 파울러는 중간 합계 2언더파, 공동 58위로 마쳤다. 이번 대회에서 페덱스 랭킹을 대폭 끌어올리지 못한 만큼 플레이오프 2차전 출전은 사실상 무산됐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6·미국)도 흑역사가 있다. 2020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GC(파72)에서 열린 마스터스 마지막날 4라운드 12번홀(파3)에서 공을 세 차례나 물에 빠뜨리면서 10타 만에 홀 아웃했다. 파보다 7타를 더치는 셉튜플보기를 기록한 것. 마스터스 대회에서 5번이나 우승한 우즈가 나무에서 떨어진 몇 안 되는 사례다.
최근 LIV골프로 옮긴 재미교포 케빈 나(39·미국)는 2011년 발레로텍사스오픈 1라운드 오크코스 9번홀(파4)에서 나무를 다섯 차례나 맞춘 뒤 헛스윙까지 해 규정 타수보다 12타 많은 듀오데큐플보기를 기록했다. 존 댈리(54·미국)는 1998년 베이힐인비테이셔널 6번홀(파5)에서 13오버파를 쳐 트레데큐플보기를 한 바 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