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준칙은 지속가능한 나라 살림을 위해 나랏빚과 재정수지를 일정 한도 내로 관리하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1992년 유럽연합(EU)이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통해 도입하는 등 대부분의 ‘지각 있는’ 나라들이 이를 법률로 제정해 운용하고 있다. ‘지각 있는’이라고 한 이유는 빚을 감내 가능한 한도에서 내는 게 미래 세대를 위한 현세대의 ‘도리’이자 ‘염치’라는 의미에서다. 전 세계 195개국 중 절반 가까이(92개국)가 그런 도리를 따랐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에서는 한국과 튀르키예(터키)만 빼고 예외 없이 준칙을 운용하고 있다.
지속가능 재정위한 '최소 장치'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이 이런 기본적 규제 장치도 없이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나라 살림을 해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늦었지만 새 정부가 재정준칙 도입에 의욕을 보이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제대로 된 재정 수입 확대 방안(성장 전략)도 없이 5년 내내 나라 곳간만 털어먹은 좌파 정권이 재집권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할 지경이다. 새 정부는 18일 토론회 개최를 시작으로 준칙 도입 작업에 나선다. 지난 정권에선 도입 계획만 내놓고 생색을 냈지만, 새 정부는 꼭 법제화에 성공하길 바란다.
준칙 내용은 다 알려진 대로다. 나라 살림 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 내에서, 국가채무는 GDP의 60% 이내로 관리한다는 게 골자다. 또 예산부수법안 제출 시 재원 조달 방안 첨부를 의무화하는 등 여태까지 이런 규제가 없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상식적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국가채무비율을 (GDP의) 40% 안팎으로 관리하겠다는 근거가 뭐냐”(문재인 전 대통령)는 유의 자기모순적이고, 무책임한 정치적 발언을 다시는 듣지 않게 되길 기대해 본다.
그러나 그에 앞서 꼭 생각해볼 게 있다. 준칙은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총액에 관한 ‘느슨한’ 규율에 불과하다. 거기엔 효율적 재원 배분에 관한 고민이 빠져 있다. 부채총액을 한도 내에서 관리하더라도 예산 사업 내용이 엉망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덕도신공항 건설 사업 같은 것들 말이다. 여야 정치권은 지난해 4월 지방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주무부처와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14조원짜리 초대형 국책 사업을 위한 특별법까지 만들어 통과시켰다. 안전성과 경제성 등에서 기준 미달인 사업을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면제하면서 덜컥 예산 사업 목록에 넣은 것이다. 이런 예산 낭비 사업들을 두고 재정 건전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 재정 준칙을 도입한다면서 예비타당성 면제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방침도 어불성설이긴 마찬가지다.
준칙의 실효성도 의문이다. 국회에 제출된 다섯 건의 관련 법안은 예외 규정으로 ①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②경제적 피해 규모가 큰 대규모 재난 ③코로나 등 성장·고용상의 중대한 변화가 우려되는 경우 등을 들고 있다. 예외가 너무 광범위해 마음만 먹으면 민생 위기 등을 명분으로 준칙을 무력화할 여지가 크다.
예산낭비 사업 솎아내야 효과
이외에도 많은 지적과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준칙 도입을 미루는 이유가 돼선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허점을 채우고 보완해 법제화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재정 만능주의’ 정권 5년 만에 빚 증가 세계 1위 국가로 전락하며 국내외 경제연구기관들로부터 일제히 재정 건전성에 대한 경고를 받게 된 현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법제화 과정에서 퍼주기 정책의 단맛을 경험한 거대 야당의 반발이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허점을 제대로 보완하고 싸움에 나서야 재정 개혁에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