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됐든 제 잘못이 가장 크죠. ‘라 바야데르’ 전막 공연을 꼭 하고 싶었는데. 팬들에게 너무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기자실에서 만난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기민(30)은 자리에 앉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지난해 4월 말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 솔라르 역으로 두 차례 출연하기로 했다가 코로나19 자가 격리 면제 불발로 내한이 무산되면서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였다.
‘라 바야데르’는 그에게 2016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당스’에서 ‘최고 남성 무용수상’을 안겨준 김기민의 대표작이기에 속상한 마음이 더 큰 듯했다. 김기민은 2011년 발레리노로는 아시아인 최초로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기 전인 2010년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 주역을 맡았다. 그는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10여년 동안 갈고닦은 ‘솔라르’를 고국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 ‘라 바야데르’는 ‘사랑의 전설‘과 함께 제가 가장 아끼고 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언젠가 전막 무대로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기민은 18~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리는 ‘발레 슈프림 2022’ 갈라 공연 무대에 선다. 영국 로열발레단의 마리아넬라 누네즈,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도로테 질베르,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이사벨라 보일스턴,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프리드만 포겔 등 명문 발레단의 톱스타들과 함께다. 김기민은 로열발레단의 간판스타인 마리아넬라 누네즈와 파트너를 이뤄 18·19일에는 ’해적‘의 그랑 파드되, 20일(2회)에는 ’돈키호테‘의 그랑 파드되를 춘다. 2018년 11월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키호테’ 내한 공연 이후 3년 9개월 만의 고국 무대다.
“한국에서 갈라 공연은 처음입니다. 부분적인 갈라보다는 전체를 보여줄 수 있는 전막 무대를 선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 기쁩니다.”
이번에 함께 파드되를 출 누네즈는 2019년 마린스키극장에서 열린 단독 공연 ’김기민 리사이틀‘에서 처음 합을 맞췄다고 했다. 김기민은 2015년 역시 아시아인 최초로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가 됐고, 발레단 최고 스타들만이 할 수 있는 단독 리사이틀을 2019년과 2021년 두 차례 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주역이라고 해서 다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23세에 첫 제의가 들어왔을 때 부상을 당해 1년 정도 쉬게 돼 아쉬웠는데 그때 못한 게 잘된 일 같아요. 당시는 ‘최연소 타이틀’이 크게 다가왔지만 보다 완성된 춤과 모습으로 공연하게 돼 미루기를 잘했죠.”
마린스키 극장의 단독 리사이틀은 무용수로서 큰 영광이다. 한 무대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소화할 수 있는 실력은 물론 넓은 극장 좌석을 꽉 채울 수 있는 티켓 파워가 있어야 한다. 마린스키 발레단 270여 명의 단원, 13명의 수석 무용수 중에서도 단독 리사이틀을 할 수 있는 무용수는 극소수다. 두 번의 ’김기민 리사이틀‘은 모두 일찌감치 매진됐고, 표를 구하기가 어려워 최고가를 기록했다. 명실상부한 ‘마린스키의 으뜸 왕자’가 된 셈이다.
김기민은 누네즈와의 첫 무대에서도 ‘해적’ 파드되를 췄다고 했다. “누네즈는 테크닉이 뛰어날 뿐 아니라 상대방을 잘 배려하는 최고의 무용수입니다. 이후에도 두세 번의 갈라 공연에서 파트너가 됐는데 정말 호흡이 잘 맞았어요. 개인적으로도 친해졌고요. 언젠가는 전막 무대에서도 함께하고자 약속했죠.”
김기민은 공연 섭외가 들어와 출연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게 파트너라고 했다. “연습실에서의 관계가 무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이번에 파트너가 누네즈라고 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 고국 팬들께도 누네즈와 함께 추는 파드되를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이번 갈라 무대도 무척 기대됩니다.”
무용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발레리노의 전성기를 28~34세라고 얘기한다. 체력과 예술성의 조화가 정점을 이루는 나이대라는 것이다. 김기민이의 나이가 딱 30이다. 그의 테크닉과 음악성, 예술적인 표현력은 현재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기민은 올 상반기에만 40회 전막 공연에서 20개 레퍼토리를 소화했다고 했다. 2주 동안 6개 레퍼토리를 해낸 적도 있다고 했다. 놀라운 출연 횟수와 작품 소화력이다.
지금이 전성기일까. “제가 작품 욕심이 많고 해낼 자신이 있다 보니 마다하지 않았어요. 이번 갈라 무대에 서는 프리드만 포겔이 올해 43세인데 자신의 전성기는 지금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게는 여전히 배울 게 많고, 주역을 맡기엔 부족한 레퍼토리도 있습니다. 저 역시 42~46세를 전성기로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체력을 잘 관리해야죠.”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총감독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해온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마린스키와 볼쇼이 발레단 일부 무용수들은 러시아를 떠나기도 했다. 발레계 월드 스타인 김기민은 해외 언론 등에서 마린스키발레단에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술과 정치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쟁은 무조건 빨리 끝나야 하고요. 솔직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에 남은) 저를 공격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죠. 개인적으로는 (전쟁과 관련한) 예술인 각자의 선택을 편견 없이 존중합니다. 저는 이번 한국 방문도 예술인으로서 고국 팬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드리러 온 것입니다. 한국 발레와 세계 발레를 위해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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