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학대·따돌림…유명 동화작가들의 충격적인 과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2-08-20 07:00   수정 2023-04-27 16:15


<눈사람 아저씨>와 <꼬마 니콜라>를 아시나요. 책 제목은 몰라도 그림은 한번쯤 보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까요. 두 책은 전 세계에서 각각 550만부, 2000만부 이상 팔렸죠. 애니메이션 등 여러 매체로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주 이 작품들의 작가, <눈사람 아저씨>의 레이먼드 브릭스(1934~2022)와 <꼬마 니콜라>의 장 자크 상뻬(1932~2022)가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부고와 함께 이들의 일생이 재조명됐는데요. 작품만 보면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며 살았을 것 같은데, 두 작가 모두 삶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불행한 예술가들이 광기 어린 명작을 그려내는 건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절규’를 그린 에드바르 뭉크처럼요. 그런데 브릭스와 상뻬는 그 반대였습니다. 커다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순수하고 깨끗한 동심의 세계를 창조해냈죠. 알고 보면 감동적인 동화를 쓰고 그린 작가들 중에서는 이들처럼 큰 불행을 겪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 작가들의 삶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눈 녹듯 떠나간 가족을 그리며…

<눈사람 아저씨> 이야기는 눈이 펑펑 오는 어느날 소년이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씨의 소년은 눈사람이 추울까봐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도 매 줍니다. 밤이 오고 부모님이 잠자리에 들어도 소년은 눈사람 생각뿐입니다. 눈사람이 잘 있나 문을 열어본 순간, 마법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눈사람이 모자를 벗고 아이에게 인사를 한 거죠.

소년은 눈사람을 집안으로 데려와 집 구경을 시켜줍니다. 눈사람은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입니다. TV도 켜보고, 치약도 짜 보고, 아버지의 옷도 꺼내서 입어 보죠. 신나게 장난을 치고 난 뒤 둘은 만찬을 즐깁니다. 그리고 나서 눈사람은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손을 잡고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눈사람은 밤하늘을 날며 아이에게 화려한 성과 바다를 구경시켜 주고, 동이 틀 무렵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 앞에서 아이를 꼭 안아주며 인사를 합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소년.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가 보니 눈사람은 녹아내린지 오래입니다. 모자와 목도리, 단추만이 남아 있습니다. 소년이 눈사람의 흔적 앞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브릭스가 1978년 펴낸 이 동화책에는 글이 한 줄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여러 장면과 섬세한 표정 묘사를 통해 아이들도 줄거리를 쉽게 알 수 있죠. 그림과 연출은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소재와 이야기지만,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동화의 고전’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고인은 글에 딸린 부속품에 불과했던 삽화를 예술로 끌어올렸다”며 “그의 삽화 문학은 성인들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고 평가했지요.

하지만 브릭스는 <눈사람 아저씨>를 그렸을 때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1971년 백혈병으로 별세했고, 같은 해 아버지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3년에는 백혈병을 앓던 아내마저 잃었습니다. 1966년 영국의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인 케이트그린어웨이상을 받으며 막 날개를 펴기 시작한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죠. 이후 그는 일에 몰두합니다. <산타 할아버지>(원제 Father Christmas·1973년), <눈사람 아저씨> 등 여러 명작이 이때 나왔습니다.

<눈사람 아저씨>의 결말도 이런 사연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2012년 영국 주간지 라디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해피엔딩을 만들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죠. 눈사람은 녹고, 내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동물들은 죽고, 꽃도 시듭니다. 모든게 그래요. 우울할 건 없어요. 이게 삶의 진실입니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삶은 유한하다’는 메시지는 반복됩니다.

<눈사람 아저씨>를 그리며 그는 떠나간 가족들과 녹아버린 눈사람을 겹쳐 봤을 겁니다. 한때 마법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더이상 곁에 없는…. 아이들이 읽기에는 가슴 아프지만, 결말 덕분에 이 동화는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시린 진리를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알려줬으니까요.
간절히 꿈꿔온 행복, 그림으로나마 움켜쥐다

<꼬마 니콜라>는 1959년부터 벨기에 주간지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르네 고시니(1926~1977)가 글을 쓰고 상뻬가 그림을 그린 이 작품은 금방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죠. 책의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삽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림 곳곳에 숨어 있는 재밋거리들도 매력적이었지만, 더욱 좋았던 건 특유의 순수하면서도 다정한 분위기였죠.

하지만 상뻬의 어린 시절은 그림과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가 세 살 때 다시 친모의 품에 안깁니다. 하지만 불행은 계속됐죠. 술주정뱅이 의붓아버지가 매일같이 어머니와 그를 때렸거든요. 항상 가난에 시달렸고요. 열네 살에 나이를 속이고 군에 입대했지만 결국 나이가 밝혀져 쫓겨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만화가로 성공을 거둔 뒤에도 그는 이런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습니다. 80대에 들어선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었죠.

“<꼬마 니콜라>를 그리는 건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법이었다”고 상뻬는 말했습니다. 학대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꿈꾸던 행복한 일상을 그림으로나마 풀어냈다는 거죠.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려본 장면들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그토록 섬세하면서도 다정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나이가 들어서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뒤부터는 빨리 걷거나 뛰는 사람만 그리게 되더라구요. 그림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하는 거죠.”


AFP 통신은 그의 부고를 전하며 “상뻬가 작품에서 보여준 다정함은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비참함과 극명히 대조된다. 흥미로운 내용도, 불편한 진실도 그는 조롱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고 평가했습니다.
불행에서 길어올린 명작들
‘동화의 아버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삶은 불운했습니다. 집안은 가난했고 가족 중에서는 심신이 멀쩡한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요. 외모는 볼품없었습니다. 별명이 ‘덴마크의 오랑우탄’이었을 정도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곧잘 따돌림을 당했고, 평생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거나 사귀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그가 생전 겪었던 좌절과 고통이 <미운 오리 새끼>,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등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합니다.


동화는 아니지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소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어린 시절도 불행했습니다. 소설이 사실 작가 자신의 얘기거든요. 어머니는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녀를 버렸다가 재혼한 뒤 하녀로 다시 데려가 학대했습니다. (몽고메리 평전 <하우스 오브 드림>)영국 그림책 분야 거장인 앤서니 브라운(76)도 10대에 아버지를 잃었죠. 그를 상징하는 캐릭터인 ‘고릴라’는 아버지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입니다. 자상하고 따뜻하지만 가족이 위험에 빠지면 공격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에서죠.

불행해야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불행을 통해 행복한 이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아름답게 그려냈죠.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분이라면, 언젠가 그 고통과 슬픔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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