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잡지 못하면 죽는다.’ 변화의 순간마다 기존 기업들이 외치는 구호다. 테크기업의 기하급수적 성장을 되돌아보면 근거 없는 위기의식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 기업들은 변화에 끊임없이 대처해왔다. 오늘날 포천 500대 기업 가운데 1995년 존재하지 않았던 기업은 17개에 불과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머지 483개 기업은 주된 비즈니스 모델이 달라졌을지언정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 것이다.
줄리언 버킨쇼 영국 런던경영대학원 교수는 1995년과 2020년의 포천 500대 기업과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를 비교하며 이를 강조한다. 1995년과 비교할 때 사라진 기업은 각각 17개와 10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디지털 혁신 혹은 디지털 전환으로 모든 부문이 위협받는다거나, 기존 기업이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인식은 섣부른 선입견일 수 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1995년 이후 설립돼 2020년 포천 500대 리스트에 오른 신규 기업들은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 반면 주류기업은 이들보다 성장세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화이자도 비슷하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생명공학 분야에 진출하는 대신 기존 제약회사인 워너-램버트, 파마시아, 와이어스를 인수하고 마케팅과 유통 역량을 활용하는 전략을 썼다. 자사 브랜드의 높은 신뢰성과 글로벌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라는 기존 장점을 극대화해 신규 업체의 진입장벽을 높인 것이다. 기존 시장을 떠나 자신의 역량을 다른 산업에서 활용한 기업도 있다. 캐나다의 신문사 톰슨은 신문 사업을 매각하고 로이터와 합병하면서 정보 서비스에 투자했다.
제약회사 일라이릴리는 1986년 하이브리테크를 인수해 생명공학 분야에 조기 진입한 뒤 거의 3억달러를 날렸다. GM은 그 누구보다 먼저 전기자동차인 EV1을 출시했지만, 약 10억달러를 쓰고 2000년대 초 생산을 중단했다. 타임워너와 AOL의 합병은 540억달러 손실을 낳았다.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무엇보다 기술의 효과는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신문산업은 인터넷 등장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종이버전을 유지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1980년대부터 기존 제약산업을 파괴할 주인공으로 여겨졌지만, 신약이 생산되고 대량생산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부터다. 디지털 전환은 장기적인 게임이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세우고, 선제적으로 움직일 분야와 기다릴 영역을 구분하면서 가장 적합한 적응 전략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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