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5월. 경북 구미에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 컴퓨터 개발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모니터에 서울대 컴퓨터를 뜻하는 ‘SNUCOM’이라는 글자가 뜨자 연구원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구미에서 250㎞ 떨어진 서울대 연구실에서 보내온 메시지였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연결 순간’이다. 미국에 이은 세계 두 번째였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은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79)다. 일본에서 태어난 전 교수는 오사카대를 졸업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시스템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 교수는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79년 36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택했다. 전 교수는 한국 인터넷 역사의 시작점을 찍고 오늘날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2012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올해로 한국은 인터넷 개통 40주년을 맞았다. 지난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에서 만난 전 교수는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글로벌 생태계에서 리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 인터넷 기업들도 한국을 넘어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인터넷 개통 40주년을 맞은 감회가 어떻습니까.
“사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 못 했죠. 그때만 해도 한국은 살기 힘들 때니까요. 당시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에서도 수년 내 컴퓨터 네트워킹이 가능한 나라로 일본 외에 필리핀, 태국 정도를 언급했습니다. 우리 정부와 학계 일부에서도 ‘쓸모없는 연구’라는 소리가 나왔지만 밀어붙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뭔가 아쉬운 것도 있어요. 1980년대에는 분명히 우리가 통신 분야를 이끄는 국가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런 나라들이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죠.”
▷그래도 한국 인터넷 속도는 세계 최고 아닙니까.
“속도가 최고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죠. 우리가 인터넷을 ‘잘 쓰고 있다’고 얘기하려면 리더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글로벌 인터넷 거버넌스(관리 체제) 논의에서 이제 한국은 안 보입니다. 엔지니어들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모두 다 같이 노력해야죠. 인터넷 부작용도 잘 처리하지 못한 거 같아요. 개발에만 치우치면서 보안, 악성 댓글 문제 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죠.”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인터넷 기업이 글로벌 사회에서 큰 역할은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거의 국내 시장만 보고 있는 거 같아요. 국내 기업 중 10~20% 정도는 세계 시장을 바라보는 벤처기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실력이 있어요. 미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도 많아요. 해외에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는 것도 생각해야겠죠. 블록체인, 웹 3.0, NFT(대체불가능토큰) 등의 분야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인재들을 국가 차원에서 좀 더 키워야 합니다.”
▷한국 창업 생태계가 발전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능력으로 질 건 없어요. 다만 교육 시스템이 좀 바뀌어야 할 거 같아요. 미국 스탠퍼드대에 가면 컴퓨터공학 전공자와 경영학 전공자가 같이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코스가 있어요. 기획이 좋다 싶으면 실제로 창업으로 이어져요. 우리도 그런 것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죠. 한국도 대학에서 벤처들이 꽤 나오고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4·19 혁명이 일어날 때 조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던데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한국에서는 4·19가 일어났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건(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 반대 시위)이 있었죠. 오사카에 있는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다 모였어요. 고등학생은 한 5000명 정도였는데 제가 전체 학생 대표로 연설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설문 초안에 있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문장을 읽는데 ‘우리나라’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라는 것을 절감했죠.”
▷어릴 적부터 수학을 좋아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공부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수학은 오랫동안 고민해서 명쾌한 답이 나온다는 게 좋았죠. 그런데 수학을 전공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저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거 같지도 않았고요. 그러다가 ‘응용 수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컴퓨터를 한 거죠.”
▷한국엔 왜 과학 분야 노벨상이 나오지 못할까요.
“제가 외국에 가면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히 공부도 잘하고, 경제 수준도 높은데 왜 노벨상이 없을까요. 우리나라 정도면 5년에 한 명, 10년에 한 명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제가 살펴보니까 노벨상을 갑자기 받는 게 아니고 한 단계 아래 상을 받았던 사람들이 결국 노벨상까지 올라가더라고요.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시스템 공학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우리 교육 시스템이 글로벌 인재를 길러낼 수 있게 최적화됐는지를 점검하고 바꿔야 합니다. 이번에 수학계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받은 허준이 교수도 한국 공교육 시스템에서 수학에 대한 흥미를 크게 못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를 만나 수학자로서 길을 걷게 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포스트닥(박사후연구원)을 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죠.”
▷KAIST 퇴임 뒤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존경하는 선배들이 은퇴할 생각이 없으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죠. 요즘 제일 가깝게 연락하고 있는 분이 데이비드 파버 교수인데요. ‘인터넷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분이죠. 파버 교수는 나이가 아흔 가까이 되는데 지금 일본 게이오대 사이버 문명연구센터 책임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초청했어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KAIST에서 한 번씩 강연할 거예요.”
▷운동도 좋아하고, 최근엔 미국에 계셨다던데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어요. 이번 여름에 아내(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와 같이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인근 하이 시에라 지역을 트래킹했죠.”(전 교수는 이름난 운동광이다. 1980년 등반대장으로 유럽 3대 북벽(마터호른·그랑드조라스·아이거) 등정에 성공해 국민훈장 기린장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10년 뒤면 대한민국 인터넷 개통 50주년이잖아요. 그래서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있죠. 이제는 제가 주도적으로 할 건 아닌 거 같고,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다음 행사는 100주년이 될 테고, 그건 다음 세대가 해야겠죠.”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