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에 빨래하러 나온 여인들은 가족들의 옷을 말리기 위해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교를 즐겼다. 다홍색 치마에 색동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는 걱정 없는 얼굴로 강물을 바라본다. 길에서 마주친 할아버지들은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둥근 안경을 쓴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장면들은 모두 1956년~1957년 스무 살의 한 여성의 카메라에 포착된 서울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귀한 컬러 필름들은 사진을 찍은 뒤 60년이나 옷장 속 낡은 가방에 들어가 잠자고 있었다.
스무 살의 사진가는 77세가 되어서야 기억 속에 잊고 있던 필름들을 발견했다. 이사를 위해 짐을 옮기던 딸이 우연히 찾아내면서 '할머니 사진가'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주목하는 작가가 됐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2세 마리 한 유(86)의 이야기다.
1950년대 컬러 사진은 귀했다. 유씨는 첫 하와이 호놀룰루 이주 노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쿠니아 캠프 농장에서 자랐고, 1956년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와 2년 간 머물렀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던 어머니는 서울 유명 호텔 홍보책임자로 일했고, 유씨는 미군 부대에서 일했다. 그는 내셔널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신기했고, 그 특별한 순간들을 포착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군 PX에서 일본 페트리 필름카메라를 25달러에 산 그는 남대문 시장, 명동, 한강 곳곳과 농경지 등을 돌며 시민들의 삶을 기록했다.
"전쟁 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도로 포장, 농업, 쌀 타작까지 모두 손으로 이뤄졌는데 이 사진들은 한국인의 회복력과 용기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기술적 경제적으로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변화한 건 놀라운 일이죠.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풍경들입니다."
그의 사진 안엔 다양한 표정들이 담긴다. 활기찬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이는 남대문 시장, 남동생을 업고 웃으며 길을 건너는 소녀, 초가집 앞에 양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과 서양식 정장을 차려입은 여인까지 지금은 사라진 풍경들로 가득하다.
서울의 아직 많은 땅이 농지였던 시절, 볏집이나 나무를 지게에 지고 걸어가는 청년들의 모습엔 '사춘기 소년의 시골길 산책'이라는 위트있는 제목이 담긴다.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어코 밝고 활기찬 모습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1세대 사진작가 한영수(1933~1999)의 흑백사진도 오버랩된다. 색상과 선이 선명한 데다 얼굴 표정들도 살아있어 한 시대를 담아낸 귀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유씨는 "영어만 할 줄 아는 젊은 한국인 여성이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회상했다.
2013년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발견된 그의 사진들은 미국의 한국학회와 다양한 참전용사협회 등 단체와 함께 여러 차례 온오프라인 전시를 열었다. 현재 마리 앤 한 유 웹사이트를 통해 사진을 아카이브로 만들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일상의 이미지와 강력한 인물들이 교차하는 그의 사진에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담아낸 '놀라운 타임캡슐'"이라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록들로 남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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