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30년’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뉩니다. 첫 단계는 서로가 필요했던 좋은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서로 티격태격하는 시기입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 사이도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죠. 한국과 중국이 딱 이런 관계입니다.
[첫 단계]
중국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1949년 공산화된 이후 중국에선 50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규모 아사(餓死)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마오쩌둥식 공산 경제가 낳은 극심한 식량난·경제난 때문이었죠. 마오쩌둥에 이어 등장한 덩샤오핑은 달랐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안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만나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이에크가 제시한 해법은 간단했습니다. “농산물 중 일부만 국가가 갖고 나머지를 경작자가 처분하게 하라.”덩샤오핑은 하이에크의 처방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농산물 생산량이 급증했고 식량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덩샤오핑은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누구라도 먼저 부자가 되게 하자.” 소유권을 부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노선이었습니다.
덩샤오핑에겐 좋은 모델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한국이었죠. 1960년대 1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을 1만달러대로 끌어올린 한국의 비결을 배우려 한 겁니다.
한국 역시 중국이 필요했습니다. 경제 번영을 위해선 더 큰 시장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미개척지 공산 진영이었습니다. 1990년 노태우 정부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했고, 2년 뒤 중국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다른 공산국가와도 줄줄이 외교를 텄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서로 윈윈했습니다.
[둘째 단계]
중국의 한국 따라 하기는 성공했습니다. 경제 근육을 키운 중국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자랑이랄까요. “우리와 장사하려면 우리 라인에 서라”는 압력이 공공연하게 자행됐습니다. ‘2000년 마늘 파동’ ‘2002년 동북 공정’ ‘2005년 김치 전쟁’ ‘2016년 사드 공세’ ‘한국 기업 퇴출’ ‘한국 연예인에 대한 한한령’ 등은 전형적인 힘자랑이었습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식 자유시장경제가 주도하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보다 정부 주도 성장과 내정 불간섭주의를 표방한 ‘베이징 컨센서스’에 한국이 함께하도록 압력을 가해 왔습니다. 최근엔 반도체와 전기차 베터리 등에 쓰이는 희토류, 니켈, 리튬, 코발트 같은 핵심 물질을 ‘한국 길들이기’에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자원을 앞세운 공세죠.
중국은 이제 위협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그런 만큼 국제무대에서 자주 부딪칠 우려가 큽니다. 한국 젊은이들은 힘자랑하는 중국을 좋지 않게 보고 있고, 중국 국민도 중국 제일주의에 점점 빠져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과 어떤 관계를 정립해야 할까요? 적잖은 숙제를 던져준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잠깐 ! 투키디데스 함정 …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
200년 전 프랑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중국이 잠을 자게 놔두라. 중국이 깨어나면 세계를 흔들 것이다(Let China sleep: when China wakes, she will shake the world).” 나폴레옹은 중국의 미래를 내다본 것일까요? 중국이 공산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경제를 개혁하자 세계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잠에서 깬 중국은 기존 강대국인 미국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강대국에 새로운 강자가 도전하는 위험한 상태라는 겁니다. 이것을 학계에선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s Trap)’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의 기존 강국 스파르타에 신흥 강국 아테네가 도전한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듯이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죠. 자유와 시장을 모두 중시하는 우리나라는 함정 옆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기근 사태의 원인을 알아보자.2. 덩샤오핑이 추구한 ‘흑묘백묘론’을 찾아보고 그 의미를 주제로 토론해보자.
3. 중국을 싫어하는, 한국을 미워하는 두 나라 여론이 강합니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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