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11월 충남 논산 화지중앙시장에서 한 말은 돌아보면 예언인 것처럼 들린다. 8·28 전당대회에서 친명(친이재명)계가 당 지도부를 장악하면서 ‘이재명의 민주당’이 완성됐다. 이 대표가 대선에 나설 때만 해도 최대 약점은 당내 기반 취약이었다. 그의 지지 세력은 친문재인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이 대표가 당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은 대중 정치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외곽을 때려 내부에 충격을 가하는 식이다. 주역은 ‘개딸’ 등 팬덤이다. 전체 당원 중 팬덤 이 10%도 안 된다지만, 양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강한 결집력으로 여론을 주도한 팬덤과 흩어진 보통 당원의 힘은 비할 바가 못 된다. 당내에선 처럼회 등 강경 친명계가 당론을 좌지우지했다. 팬덤과 처럼회가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처럼 서로 호응하며 이재명당을 만들어 나갔다. 더욱이 친문은 구심점이 없고 이 대표만큼 윤석열 대통령과 싸워줄 지도자감이 보이지 않은 것은 기회였다.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국회의원 출마, 다섯 달 만에 대표 성취라는 비상식적인 일도 이들의 밭갈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검수완박’ 현실화와 당헌 80조 개정은 팬덤의 강력한 문제 제기→처럼회 행동→당 지도부의 충실한 수행 절차를 밟았다. 온갖 무리수와 꼼수가 동원돼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대한 방탄 1, 2호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불어재명당’이 완성됐다”는 한 당원의 글은 든든한 방탄 3호를 상징한다. 이 대표가 77.77%의 경이적인 득표율을 얻었으니 무한독주의 길을 연 셈이다. 이미 친명계가 김진표 국회의장이 꺼낸 ‘여야 중진 협의체’도 이 대표의 힘을 뺄 수 있다며 반대한 것은 계파 독단으로 가겠다는 전조다. 제왕적 총재 시절에도 좀체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과하면 체하는 법. 이런 독주체제는 민주당에는 독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대표는 팬덤 활동에 대해 “당심과 민심의 괴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민주주의 강화뿐”이라고 옹호했다.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숙의를 거치기 어려워 ‘대중 포퓰리즘’을 부를 수 있다. 이미 증명됐다. 민주당은 강성 당원들 성화로 위성정당을 세워 의회 정치의 왜곡을 불렀고, 지난해 재·보선 땐 자신들에게 귀책 사유가 있으면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을 고쳐 후보를 내 참패했으며, 폭주 입법으로 대선 패배를 불렀다. 반대 목소리는 ‘수박(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으로 낙인찍혀 조리돌림당하니 숙의민주주의는 발붙일 틈이 없는 게 민주당이 처한 퇴행적 현실이다.
벌써부터 팬덤과 강경파들은 대여 투쟁 강화를 외치며 김건희 여사 특검,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 제2 검수완박 입법 마무리 등을 밀어붙일 태세다. 이 대표가 여기에 호응한다면 민주당의 외연 확장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강경 지지층에 갇힌 결과가 선거 연패라는 점을 보면 민주당에 이런 독주체제는 큰 짐이다. 이재명은 잘나가는데 당은 거꾸로인 기막힌 역설이다. 더욱이 민주당은 이 대표를 둘러싼 검경 수사로 인한 사법 리스크까지 떠안아야 하는 판이다. 당에 대한 충성도 높은 권리당원 투표율이 30%대밖에 안 된다는 것은 ‘너희들끼리 잘해봐라’라는 냉소의 의미다. 민주당이 대통령과 여당의 고전에도 반사이익을 얻지 못하고 지지율 30%대에서 갇혀 있는 것(한국갤럽 기준)도 같은 맥락이다.
견제가 없고 힘이 한쪽으로 너무 쏠리면 줄서기, 눈치 보기, 조직 무기력을 낳을 수 있다. 민주당 내에선 벌써부터 우려가 나온다. ‘새로고침위원회’가 두 달간 활동을 마무리하며 낸 ‘지지층에 매몰돼 외연 확장에 실패해 선거에서 연전연패했고, 반(反)윤석열로만 가서는 외연 확장이 어렵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핵심을 찌른다. 이 대표가 팬덤과 처럼회가 끄는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면 ‘더불어재명당’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 대표가 이들과 손절할 수 있을지가 1차 관건인 셈이다. 이 대표의 과제는 여럿 있지만, 무엇보다 말의 신뢰부터 얻는 것이 급선무다. 툭하면 뒤집기, 남 탓, 갈라치기하는 화법으로 어떻게 더 큰 정치인이 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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