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의 밤 풍경을 이렇듯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된 건 발굴·보존·보호 위주의 문화유산 정책에 ‘활용’의 개념이 더해진 덕분이다. 2000년대 들어 문화유산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용이 곧 보존이라는 공감대가 확산하면서 경복궁·덕수궁 수문장 교대의식, 궁중문화축전, 숭례문 파수의식, 고궁 음악회 등이 잇따랐다. 오는 10월 1~9일 열리는 ‘궁중문화축전’은 경복궁 등 5대 궁과 종묘, 사직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국내 최대 연례 문화유산축제다. 고궁뿐만 아니라 국공립 박물관, 향교·서원·전통 산사 등 지역 문화재 활용도 활발하다.
최근 청와대에서의 패션 화보 촬영이 논란을 빚으면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구찌와 문화재청이 오는 11월 1일 경복궁에서 열기로 한 패션쇼가 취소됐다. 외교가와 경제계 인사, 연예인 등 500여 명을 초청해 근정전 앞마당을 중심으로 행사를 열고 근정전 전면과 좌우에 회랑처럼 연결된 행각(行閣)을 모델들의 런웨이로 활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문화재위원회의 검토도 거쳤고,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경복궁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릴 기회였는데 참 아쉽게 됐다.
영국은 국왕이 상주하는 버킹엄궁에서 국빈 행사를 열고, 프랑스는 엘리제궁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인 질 바이든 여사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는 백악관 발코니에서 패션잡지 보그의 화보를 찍었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부인 카를라 브루니도 2008년 보그 표지 화보를 엘리제궁에서 촬영했다. 문화유산의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대중과 거리를 좁히는 데 인색하지 말았으면 한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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