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부터 퇴직연금 적립금을 ‘알아서 굴려주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에 근로자들이 가입할 수 있게 된다. 지난해 12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개정돼 지난달부터 제도는 도입됐지만, 어떤 상품을 허용할지 결정되지 않아 실제 시행은 미뤄졌다.
디폴트옵션이란 퇴직연금 가입자가 일정 기간 아무런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둔 기본값(디폴트·default)에 따라 퇴직연금이 운용되는 제도다. 미국 영국 호주 등 이른바 ‘퇴직연금 선진국’에서 보편화한 제도다. 디폴트옵션이 활성화하면 그동안 연 1~2%대에 머물렀던 퇴직연금 수익률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과는 다르게 디폴트옵션으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해 결과적으로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반면 퇴직연금 적립금의 연간 수익률은 1~2%대를 맴돌고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연간 수익률은 2017년 1.88%, 2018년 1.01%, 2019년 2.25%, 2020년 2.58%, 지난해 2.00%였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한국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에 해당하는 미국 401k는 최근 10년간 연평균 8%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호주 퇴직연금 슈퍼애뉴에이션의 10년간 연평균 수익률도 8.5%에 달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수익률이 낮은 것은 ‘퇴직연금은 최후의 안전판이기 때문에 절대 손해가 나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진 근로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퇴직연금의 86.4%는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들어가 있었다.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은 13.6%에 불과했다. 미국과 호주는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이 60~70%였다. 실적배당형은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수익률이 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원리금보장형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올릴 가능성이 크다.
국내 퇴직연금의 낮은 수익률은 노후 빈곤 문제로 연결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퇴직연금을 포함한 공·사적 연금의 소득대체율(연금 가입기간 순소득 대비 연금 비율)은 43.4%로 은퇴 전 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은 이 비율이 83.7%, 프랑스는 73.6%, 독일은 68.0%, 일본은 61.5%였다.
근로자는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가 있는 금융회사(은행·보험·증권사)가 제시한 디폴트옵션 상품 중 한 개를 선택할 수 있다. 퇴직연금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디폴트옵션 가능 상품은 △원리금보장형 △타깃데이트펀드(TDF)·밸런스펀드(BF)·스테이블밸류펀드(SVF)·사회간접자본(SOC)펀드 △펀드와 원금보장 상품을 혼합한 포트폴리오형 등이다. 한 금융회사가 고용부 심의를 거쳐 7~10개의 디폴트옵션 상품을 만들 수 있다.
퇴직연금에 신규 가입한 근로자가 2주간 아무런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적립금이 자동으로 디폴트옵션 상품에 들어간다. 이미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는 기존 가입 상품의 만기가 돌아왔는데도 6주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디폴트옵션으로 전환된다. 6주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디폴트옵션 상품에 적립금을 넣을 수도 있다.
본인이 상품 운용 지시를 직접 내리는 경우 디폴트옵션은 적용되지 않는다. 디폴트옵션 상품에 가입돼 있더라도 언제든지 이를 해제하고 직접 운용 지시를 내릴 수 있다.
미국 노동부가 기업 등에 보내는 퇴직연금 상품 규정문에는 ‘퇴직연금 투자자는 장기투자자다. 원금보장형 상품에 장기 투자하면 충분한 노후 자금을 모을 수 없다’는 문구가 있다. 근로자들이 주식 등 위험자산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볼 위험보다 충분한 노후 자금 없이 은퇴하는 위험이 더 크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401k 밀리어네어’를 목표로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그 과정을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이다. Z세대(1997~2012년생) 투자자의 53%가 지난해 401k 퇴직연금에 납부하는 기여금 비중을 전년 대비 늘렸다. 자산운용사들은 이들을 겨냥해 퇴직연금을 더욱 공격적으로 운용하는 상품을 앞다퉈 출시하고 있다. 피델리티는 401k 퇴직연금 계좌로 비트코인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피델리티 직장 디지털자산 계좌’를 지난달 출시했다.
2013년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한 호주는 퇴직연금 가입자의 80% 정도가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연금을 굴리고 있다. 호주 디폴트옵션의 특징은 주식과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비중이 70%에 달한다는 것이다.
호주 퇴직연금 보험료율은 1992년 연봉의 3%로 시작했다. 이를 점진적으로 높여 현재는 10.5%다. 2025년에는 12%까지 높아진다. 연봉으로 5500만원을 받는 호주 중산층이 10% 보험료율로 30년 동안 가입해 67세에 은퇴하면 연금 계좌에 3억6000만원이 쌓인다. 디폴트옵션 평균 수익률을 가정한 시나리오다.
호주 근로자들은 연간 2만7500호주달러(약 2500만원)까지 퇴직연금 계좌에 납입할 수 있다. 예컨대 연봉 1억원의 근로자는 1000만원을 의무적으로 납부한 이후 추가로 1500만원을 넣을 수 있다. 납부금이 소득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소득세가 대폭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호주 정부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업자들을 경쟁시킨다. 한국의 금융감독원 격인 건전성감독청은 최근 7년 연평균 수익률 기준으로 최상위 펀드와 최하위 펀드를 발표한다. 최하위 펀드는 벤치마크(시장 수익률)를 0.5%포인트 이상 밑돈 펀드를 의미한다. 작년에는 최하위 펀드를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제도를 시행했다. 2년 연속 시장 수익률을 밑돈 펀드는 투자자 모집이 금지된다. 제도 시행 2년이 되는 올해 말부터 시장에서 쫓겨나는 펀드가 나온다.
영국에는 퇴직연금 운용 공공기관인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국가퇴직연금신탁)’가 있다. 영국 퇴직연금 가입자 약 2300만 명 중 절반이 NEST를 이용하고 있다. NEST 가입자의 99%는 디폴트옵션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한다. 영국은 2012년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했는데, 그해 46.5%에 불과하던 퇴직연금 근로자 가입률이 지난해 79.4%까지 올라갔다. 2015년 4억2000만파운드였던 NEST 운용자산은 올해 1분기 241억파운드로 커졌다.
NEST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한국의 TDF에 해당하는 RDF(retirement date fund)에 넣어둔다. 이 상품은 은퇴 시점이 많이 남아 있을 경우 위험자산인 주식 비중을 늘리고, 은퇴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안전자산인 채권 비중을 늘린다. RDF2040(은퇴 시점 2040년) 기준 지난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9.9%였다.
지난해 국회에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이 논의될 때 원리금보장형 상품은 디폴트옵션에서 제외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국내 퇴직연금 수익률이 연 1~2%대에 머무르는 이유는 80% 이상의 적립금이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에 넣으면 많은 근로자가 또다시 예·적금만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디폴트옵션 도입 목적이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인데, 이 같은 취지가 퇴색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법 개정 논의 당시 증권사 등 금융투자업계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은행과 보험사들이 원리금보장형 상품도 디폴트옵션에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관철시켰다.
작년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의 50.6%는 은행에 들어 있다. 생명보험사가 22.0%로 점유율 2위다. 증권사 21.3%, 손해보험사 4.8%, 근로복지공단이 1.3% 등으로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수익률 순위는 증권사가 연 3.17%로 1위다. 생명보험사(1.93%), 손해보험사(1.69%), 은행(1.59%), 근로복지공단(1.31%)은 모두 연간 수익률이 1%대에 그치고 있다.
증권사 수익률이 높은 것은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에 대한 투자 비중이 가장 높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금감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실적배당형 상품의 연 수익률은 5.18%인 반면 원리금보장형 상품은 1.59%에 불과했다.
증권사의 경우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 비중이 27.7%였다. 은행은 12.6%, 생명보험사 5.4%, 손해보험사 1.3%, 근로복지공단이 3.5%였다.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은행과 보험사는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보장형을 제외하면 고객이 증권사로 이탈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증권사가 실적배당형 상품 판매에서 은행, 보험사보다 많은 노하우를 쌓았기 때문이다.
디폴트옵션으로 원리금보장형을 선택할 수 있게 한 대표적 국가는 일본이다. 가입자의 70% 이상이 원리금보장형을 택해 수익률이 연 0~3%대에 그치고 있다.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익률이다. 일본식 모델을 따라간 한국이 디폴트옵션 제도를 시행해도 수익률이 크게 높아지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디폴트옵션은 강제성이 떨어진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미국의 경우 사측이 근로자 대표와 협의해 한 가지 디폴트옵션을 제시하고, 근로자가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이 상품에 자동 가입된다. 미국 노동부는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으로 제시하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은 120일 이내 기간 동안 제한적으로 활용하게 했다. 사측에는 디폴트옵션 상품에서 손실이 나더라도 정부의 기준에 부합하면 소송 등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면책 특권도 줬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운용에 관심이 없어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아도 실적배당형 상품에 돈이 들어가는 구조가 정착됐다. 이것이 미국 디폴트옵션의 성공 토대가 됐다.
한국은 사측이 디폴트옵션을 정해주는 게 아니라 근로자가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가 있는 금융사에서 제시한 7~10개 상품 중 하나를 직접 골라야 한다. 한국은 관련법에 기업의 면책 조항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다. ‘선택을 최소화한다’는 디폴트옵션의 기본 원리에 반하는 구조다.
근로자가 디폴트옵션 상품을 아무것도 고르지 않을 경우 ‘디폴트옵션을 선택하라’는 문자메시지 등이 전달된다. 하지만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근로자가 아무런 선택을 안 하면 강제할 방법은 없다는 게 고용부 측 설명이다. 이 경우 퇴직연금 적립금은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 고유계정(현금성 자산)에 머물게 된다. 관련법이나 시행령 개정을 통해 근로자의 선택 절차를 최소화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태훈 증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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