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근조(謹弔) 고르바초프

입력 2022-08-31 17:45   수정 2022-09-01 00:19

“토마토를 사려고 4시간 줄을 서서 받아 보니 조그마한 사과 한 쪽만 했다.” “지난봄부터 방한화도, 라디오에 쓸 건전지도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었다.”

‘고르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할 때인 1985년, 소련 신문의 독자 투고란은 이런 불만의 글로 가득했다. 54세로 최연소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그에게 도탄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 길은 개혁과 개방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대 법학과 시절 이미 미국식 대통령제와 민주주의 원리에 주목했다. 공산당 간부 시절 부인 라이사와 서방 국가들을 둘러보면서 경제 발전과 언론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이렇게 탄생했다.

소련의 고질인 알코올 중독을 처치하기 위해 금주령도 선포했다. 술을 구하지 못하게 된 소련인들이 향수, 접착제 등 알코올이 들어 있는 모든 물품을 술로 활용했을 정도로 병폐가 심각했다.

무엇보다 소련 경제에 큰 부담은 미국과의 군비 경쟁이었다. 미국의 국방비 총액은 소련보다 많은데도 국내총생산(GDP)의 7%에 불과했는데, 소련은 무려 30%에 달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한 유명한 레이캬비크 군축 회담을 계기로 1987년 제1차 군축이 이뤄졌고,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과 함께 역사적인 냉전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개혁·개방과 평화 모드는 눌렸던 용수철이 한꺼번에 튕겨 오르듯 구체제의 급격한 붕괴를 초래했다. 체코 벨벳 혁명을 필두로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민주화와 독일 통일, 소련 해체 등이 연쇄적으로 이뤄졌다. 그는 마지막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자 최초의 소련 대통령이 됐으나, 199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다. 말년은 비참하고 외로웠다. 연금은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1달러도 채 안 됐으며, 해외 강연이 끊기자 피자헛과 루이비통 광고모델까지 했다. 그의 사망으로 레이건·부시(아버지) 대통령,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등 냉전 종식을 주도했던 정치인들이 모두 고인이 됐다. 그러나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유산을 파괴하면서 신냉전 시대를 열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는 러시아인들에겐 미움을 샀지만, 무혈의 공산체제 종식과 동유럽 민주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지도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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