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 년간 선거판은 박빙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영남이라는 압도적 표밭을 갖고 있는 보수정당의 몰락이었다. 인물, 전략, 전투력 모두 선거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내부 권력 다툼에 골몰하다 보니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지난 총선에서 무참하게 무너진 이후엔 부정선거 여부를 놓고 격렬한 내부 총질을 벌였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판세를 뒤집은 것은 보수 유권자들의 결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한다”는 절박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트레이드마크인 정의와 공정을 놔두고 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국정의 이념적 전환을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대통령실과 당정은 모두 겉돌고 있는 느낌이다. 야당과 비판언론의 파상적 공격이 취임 초부터 이어졌는데도 대통령실 참모 중에 누구 하나 맞받아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비서는 입이 없다”는 희한한 예법 뒤에 숨어 마치 남의 일처럼 대통령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관료와 검경은 지지율 하락을 지켜보며 눈알만 굴리고 있다.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절박감이 없으니 보신주의만 기승을 부린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국민의힘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다. 윤핵관들과 이준석의 대치는 이념과 정책에 대한 노선투쟁이 아니다. 가깝게는 총선, 멀게는 대선을 겨냥한 권력 다툼이다. 이 사람들이 지난 정권을 상대로 이렇게 당찬 투쟁을 한 적이 있던가, 새삼 돌아볼 정도다. 누가 봐도 양쪽 다 패자가 될 것 같은데, 정작 이들의 눈엔 국민에 대한 두려움 대신 상대방에 대한 증오만 이글거린다.
집권여당이 일찌감치 파탄에 이르고 보니 그동안 정권교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한국 보수정당의 허약성과 졸렬함을 목도하게 된다. 국민의힘 내부에는 가치동맹에 대한 의식이 없다. 보수가 분열된 탓도 있지만, 애초 구심점 자체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에 경제민주화를 들고나온 것이나, 보수정권을 재창출한 박근혜 정부가 감정적 공천 보복을 일삼은 점을 상기시켜보면 알 수 있다. 지배적 이념이 없는 정당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구성원들이 가치 대신 권력의 부침을 각자도생으로 좇기 때문이다. 지금 여당 내 영남권 의원들이 대체로 그렇다. 입바른 소리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도 용케도 재선, 3선을 해낸다. 보수 정신의 회복을 외치면서도 광풍이 몰아칠 때 깃발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 결과가 이준석과 윤석열로 대표되는, 사실상 긴급 수혈 대타들의 발탁과 추대였다. 기성 정치인들로는 보수정당을 쇄신할 역량이 없다고 본 지지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30대 젊은 당 대표와 검찰총장 출신 정치 신인을 대선 후보로 각각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질문은 다시 근본적 문제로 돌아간다. 누가 한국 보수의 깃발을 지킬 것이냐다. 윤 대통령은 진영을 넘어선 국가 지도자이고, 이준석이나 윤핵관들은 그릇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마땅한 리더가 없으니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을 테고, 이제 다시 또 다른 비대위를 만든다고 하니 보수의 분열과 지리멸렬이 목전에 닥쳤다. 초유의 대타작전으로 기사회생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꼴이다. 이대로면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을 자임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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