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 개입해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미국 사모펀드(PEF) 운용사 론스타에 약 2800억원(이자 185억원 포함 총 2985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의 판정이 나오면서 당시 매각에 관여한 정부 주요 관계자들에 대한 책임론에도 불이 붙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 전·현직 고위 공무원들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구상권은 채무를 대신 갚은 사람이 빚을 갚아야 할 당사자에게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이 때문에 ‘론스타 사태 책임자’ 지목 구간도 2010~2012년으로 압축되는 양상이다. 이 시기 차례로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던 윤증현 윤경제연구소장과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 금융위원장을 지낸 진동수 전 수출입은행장과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금융위 부위원장이었던 추경호 장관 등이 집중 조명받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이날 논평을 내 “진상 규명은 당연한 것이며 당시 잘못된 판단을 한 공무원 개인의 책임이 있다면 구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도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를 통해 ‘모피아’들이 론스타의 ‘먹튀’를 위해 복무했다는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고 엄정한 법의 심판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법조계에선 그러나 정부 조직의 일원으로 각자 맡은 책임을 이행하는 성격이 강한 공무원의 직무 특성상 몇몇 개인이 대규모 구상금을 부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시 외환은행 매각 승인 작업은 현재 책임론에 휘말린 관료 몇몇이 아니라 금융위와 국무총리실, 법무부 등으로 구성된 범정부 태스크포스(TF) 차원에서 진행됐다. 일종의 ‘전원합의체적 결정’이란 얘기다.
법조계 관계자는 “공무원은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직업이기 때문에 웬만한 불법행위가 아니라면 개개인에게 정책 이행을 두고 강하게 책임을 묻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정부 차원의 판단을 관료 개인 책임으로 돌릴 경우 ‘제2의 변양호 신드롬’이 불어닥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2003년 외환은행 매각을 주도했던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은 헐값 매각 시비에 휘말려 구속된 뒤 4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공무원 사회엔 ‘책임질 사안은 손대지 않는다’는 트렌드가 확산됐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엔 해외 자본에 대한 자료가 없었고 검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며 “그 이후 은산분리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지적에 여러 차례 제도 개선을 시도했지만 ‘재벌 사금고화’ 논리에 막혀 번번이 무산된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성/이상은/이호기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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