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위기가 재점화한 것은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다. 러시아는 노르트스트림1 차단 이유가 보복성 조치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비롯된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가 철회될 때까지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한 OPEC+의 감산 결정 역시 미국 조 바이든 정부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로 읽히고 있다. 미국 의회의 사우디 전투기 수출 승인을 압박하는 한편 미국의 내년도 사상 최대 원유 생산 계획에 제동을 걸려는 것이다. 이런 조치의 배경에는 자원을 무기 삼아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국제 정세를 조성하려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사우디의 빈살만 왕세자 같은 에너지 패권국의 냉혹한 스트롱맨들이 버티고 있다.
석유와 가스 가격의 동시 급등은 지구촌에 혹독한 겨울을 예고한다. 네덜란드 TFT 기준으로 가스 가격은 1년 전에 비해 이미 880%나 치솟았다. 가스 수입의 55%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독일은 가스를 구하기 위해 총리가 캐나다 등으로 동분서주하는 것은 물론 급기야 자존심을 접고 프랑스에도 손을 내미는 형편이 됐다.
연금 생활자들의 가처분 소득 중 40%가 에너지 비용이 될 것이라는 영국에선 올겨울 ‘난방이냐 빵이냐, 죽느냐 사느냐’의 신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올 것으로 우려된다. 그런 고통의 목소리는 정치인들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고, 전쟁을 종식하라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 바라는 푸틴에게 석유 감산 결정은 크게 반길 일이다. 인플레이션 정점을 기대하고 있는 미국 등 서방 세계에 다시 긴장 모드를 불어넣어 줄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정한 현실이 세계 5위 에너지 수입국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입체적이다. 에너지 월동 물량 확보와 같은 단기 대응은 차치하고, 독일처럼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중국 의존도가 20%를 웃도는 우리로선 더욱 그렇다.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해외 자원개발 전략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 신냉전이 부추기는 자국 중심주의와 에너지 보호주의는 다시금 자강(自彊)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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