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경제는 진화 시스템”이라고 주장한 논문으로 유명하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기업가를 좁은 의미의 영웅으로만 한정하기 어렵다. 특히 지식과 기술, 아이디어가 주도하는 경제 시대에는 누구나 기업가가 될 수 있다. 기업가와 비기업가, 개인과 기업 간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유저 이노베이션(user innovation)’으로 사용자가 하루아침에 기업가로 변신하고 있고, 사내벤처 등 창업과 피고용 사이의 회색지대도 많다.
슘페터는 기업가의 동반자로서 금융의 역할을 강조했다. 1차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의 제임스 와트와 투자자 매슈 볼턴은 ‘혁신의 짝’이었다. ‘혁신의 대중화’ ‘기업가의 대중화’를 상징하는 스타트업 시대에 ‘기대의 생태계’로 불리는 금융의 역할이 더욱 필요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금융당국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업가 정신을 고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그린스펀 재임 중 기술 혁신이 촉진됐고 높은 생산성 달성이 가능했다”고 극찬했다. 닷컴버블 붕괴 후 금융이 조정기를 거치고, 다시 혁신의 열차에 동승한 미국과 달리 한국은 기나긴 벤처 빙하기로 접어들어야 했다. 긴축의 시대, 한국의 금융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윤석열 정부가 ‘펀드의 펀드’라는 모태펀드 예산을 축소한다는 모양이다. 민간 주도 경제로 간다는 명분이라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모태펀드가 민간 벤처 투자를 오히려 몰아내는 부분이 있다면 손을 봐야겠지만, 시장 실패 영역에 투자하거나 마중물 역할로 민간의 신규 벤처 투자를 자극하는 부분은 더욱 확대해야 맞는다. 민간 벤처 투자가 위축되는 긴축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모태펀드의 규모 축소가 아니라 투자 대상과 전략의 리세팅이 요구되는 것이다.
긴축의 시대를 맞아 정부가 민간 벤처캐피털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해 글로벌 펀드가 나올 수 있게 하거나, 획기적인 민간 자금 유인을 위한 인센티브를 고민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유니콘 기업이 탄생할 때마다 정부는 정책의 성과물로 자랑하지만 결정적 단계에서 투자에 참여한 해외 글로벌 펀드가 보면 웃을 일이다. 그렇다고 국내 은행, 보험 등 제도권 금융이 스타트업 투자의 구세주 역할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비이자수익을 늘리고 싶은 은행들로서는 지금 같은 긴축 상황이 몇 년 후를 내다보고 인공지능(AI) 등 유망한 스타트업에 투자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 규모는 극히 제한적이다. 각종 규제와 감독 규정상 스타트업 투자는 부동산보다 위험 가중치에서 훨씬 불리하기 때문이다.
‘초격차’ ‘지속적 경쟁우위’란 말이 나오지만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경쟁우위는 일시적”이란 뜻이다. 긴축의 시대에는 망하는 기업이 속출한다. 냉혹한 ‘서바이벌 게임’에서는 민첩한 스타트업의 수혈이 절실하다. 글로벌 기업이 앞다퉈 스타트업 인수합병(M&A)을 위한 기업벤처투자(CVC)에 나서는 이유다. 한국의 금융·경쟁당국은 CVC에도 제한을 가하고 있다. 기업의 신속한 사업 재편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 완화에 나설 의지도 없다.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경제’는커녕 ‘민간의 각자도생조차 정부가 태클을 거는 경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거시적인 금융통화정책이라도 내일을 기약하는 긴축의 비전을 보여주면 또 모르겠다.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업가 정신을 고민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미 글로벌 유니콘 기업 4분의 3이 미국과 중국에서 나오고 있다. 미·중의 공급망 재편이 혁신생태계의 블록화로 가면 쏠림 현상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무역수지 적자 구조가 심상치 않다. 정부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무역금융 확대라는 고정 메뉴를 반복하면서 이 시기만 넘기자는 식이다. 수출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한다. 내일의 수출이 지금의 기업·산업에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긴축의 시대일수록 새로운 기업·산업을 위한 혁신금융이 흘러넘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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