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인상하는데 돈 푸는 각국 정부…'탈세계화의 역설'

입력 2022-09-12 10:27   수정 2022-10-12 00:01


지정학적 위기로 인한 탈(脫)세계화가 각국 정부를 옭아매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코로나19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공급망 혼란이 겹치며 정책 방향에 혼선이 빚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플레이션 잡으려 금리 올리는데, 돈 푸는 정부
11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쟁으로 촉발된 탈세계화가 각국 정부를 딜레마에 빠트렸다고 진단했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 속도를 높이고 있는 동시에 탈세계화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려 보조금을 퍼붓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급망 재편이 대표적이다. 미국 정부는 520억달러 규모의 지원방안이 담긴 ‘칩4’ 정책을 시행했다. 중국에 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취지다. G7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응하려 6000억달러를 개발도상국 인프라에 투자할 방침이다.

전쟁의 여파도 상당하다. 독일은 군(軍) 재무장에 1000억달러를 지출할 예정이다. 서방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에 7500억달러를 쏟아부을 태세다.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위기도 보조금을 확대했다.

독일 정부는 650억 유로(약 88조원)를 에너지 구호 지원금으로 쓴다. 오스트리아는 25억유로(약 3조원)를, 스웨덴과 핀란드는 에너지 기업 보조금으로 330억유로(약 45조원)를 지원할 예정이다. 영국은 1000억 파운드(약 159조원)를 에너지 위기 대응 예산으로 책정했다.

금리를 인상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중앙은행과 엇박자를 낸다는 분석이다. FT의 부편집장인 라나 포루하는 “각국의 보조금은 결국 단기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며 “국가부채 증대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금리 인상 기조가 상황을 더 악화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FT는 금리인상으로 경기침체가 도래하면 세수가 줄어들 거라 내다봤다. 각국 정부가 극적으로 지출을 줄이지 않는 한 결국 부채를 늘려 지원 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을 더 억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EU 재무장관 회의에서 “비용이 얼마나 들든 사회적 불안을 잠재우려는 지원 기조는 올바른 인플레이션 대응책이 아니다”라며 “인플레이션과 싸우다가 물가상승에 잡아 먹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포루하 FT 부편집장도 “금리가 오르면 부채를 줄이는 게 이상적인 방향”이라며 “안정적인 재정 정책이 수반되지 않는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부채 증가 등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차례 예견된 위기, 실패도 반복하나
서방국가의 위기는 예견된 일이었다. 과거 실수를 되풀이한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유럽은 지난 8년 동안 러시아와 위기감이 고조됐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친러시아 세력과 간헐적인 전투가 2020년까지 이어졌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전투로 인한 사망자는 총 1만 4000여명에 달했다.

군사적 위기 속에서도 EU는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낮추는 데 실패했다. 2014년 당시에도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볼모로 잡고 유럽을 위협했다. 가스 가격을 대폭 인상하겠다는 경고였다. 유럽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유럽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는 34.5%였다.

시간이 흐르며 비중이 커졌다. 2018년 유럽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45%에 달했다. 2020년 40.8%로 소폭 축소된 뒤 지난해 39% 수준을 유지했다. 독일은 되레 러시아와 연결된 천연가스 공급관인 노르드스트림-1에 이어 두 번째 천연가스 공급관인 노르드스트림-2를 착공하려 했다. 이를 추진한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오늘날 시위대에게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다.

과도한 의존이 화를 불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졸탄 포자르 크레디트스위스(CS) 전략분석가는 “독일이 2조 달러 규모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려 200억달러 규모의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활용한다”며 “생산요소 중 하나인 가스로 인해 산업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러시아 의존도가 과도하게 높았다”고 분석했다.

미국도 통화 긴축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2017년 라스 스벤슨 스톡홀름대 교수는 철저한 편익·비용 분석 없이 통화정책으로 금융시장을 안정화하려는 시도는 위험성이 크다고 비판한 바 있다. 주택 정책, 재정정책 등 미시 정책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스벤슨 교수는 미 프린스턴대 교수를 거친 뒤 스웨덴 중앙은행 부행장, 세계은행, 뉴욕 연방은행 등에서 경제 고문으로 활약한 스웨덴 경제학자다. 미 경제학논문문학회(IDEAS/RePEC)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스베슨 교수는 “경제 위기 관련 비용을 감안하면 통화 긴축으로 인한 부작용이 효익보다 더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27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 회의에서도 비슷한 경고가 반복됐다. 미 존스홉킨스대학의 프란체스코 비앙키 교수와 시카고 연방은행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리어나도 멜로시는 “최근의 인플레이션의 절반 정도가 재정적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두 경제학자는 “재정지출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재정 불균형으로 인플레이션 압박이 더 거세질 것”이라며 “지금같이 병적인 상황에서 통화 긴축은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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