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회사 제품과 서비스 개선 아이디어를 찾는 사내 공모전이 ‘놀금(회사 업무를 쉬는 금요일)’에 열립니다. 참여한다면 이날 하루 24시간은 퇴근도 못하고 회사에서 밤을 꼬박 새야합니다.
본업에 따르는 야근도 아니고, 하라고 등을 떠미는 상사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본인이 사서 하는 100% 가욋일입니다. 이런 행사에 이른바 ‘MZ세대’들은 얼마나 참여할까요.
지난달 IT기업 카카오가 연 사내 해커톤 ‘24K리유니언’이 딱 이런 행사였습니다. 직원들이 평소 생각한 아이디어를 24시간 동안 기획·구현해 시제품(프로토타입)을 발표하는 자리였는데요. 이번 해커톤에 개인 혹은 팀 단위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카카오 임직원이 230여명에 달합니다. 놀금에다 예비군 훈련 일정이 겹쳤는데도 그랬습니다.
카카오는 왜 이런 행사를 열었고, 또 참가 직원들은 휴일을 즐기는 대신 왜 사서 고생을 택했을까요. 행사에 참여한 카카오 직원들을 만나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도전/ 자아실현을 원하는 직원들
대응/ 회사의 지원과 신뢰
이번 카카오 해커톤에선 3·5·6년차 20~30대 직원 세 명으로 구성된 팀 ‘비트투더 영투더일(bit to the 0 to the 1)’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최근 카카오의 신사옥 카카오 판교아지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내 것을 만들어 보고 싶어 해커톤에 참여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일상에 ‘플러스 알파’가 되는 자아실현 기회를 갖고 싶었다는 얘기입니다. 대응/ 회사의 지원과 신뢰
우승팀의 팀장을 맡은 황동현씨는 해커톤에 대해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본능적인 기쁨을 실현할 기회로 봤다”고 말했습니다. 커머스기술팀에서 iOS 앱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평소 업무 경계를 벗어나 무엇인가 내 것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습니다.
황동현씨와 같은 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개발자 손정규씨는 “단시간 집중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개발해 결과물까지 만들어내는 기회가 흔치 않다”며 “이런 과정이 재미있을 것 같아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다음 뷰창작파트의 서비스 기획자인 팀원 심지현씨는 “내가 주체적으로 서비스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점에 매료됐다”고 했습니다. 자율적으로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운신의 폭’이 넓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는 설명입니다.
이들이 이같이 생각한 데엔 근거가 있습니다. 회사가 직원의 아이디어를 믿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입니다. 카카오는 이번 해커톤 주제를 ‘비대면 시대를 겪으며 각자 필요하다고 생각한 기능’으로 잡고 직원들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해커톤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실제 서비스화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참가자들이 ‘결국은 헛고생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해커톤 참여자에게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팀이나 개인에 판교아지트 회의실을 각각 배정해주고, 각 회의실엔 과자박스와 과일바구니 등 간식을 푸짐하게 제공했습니다. ‘시댁이나 처가 방문 등 신경을 많이 쓰는 자리에나 가져갈 것 같은 과일바구니’였다는 후문입니다. 손정규씨는 “카카오는 직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각자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분위기”라며 “이같은 기조를 해커톤 행사 내내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도전/ 다른 직군과의 네트워킹이 필요해
대응/ 전 직군 ‘만남의 장’ 제공
MZ직원들의 ‘니즈’를 포착한 지점이 또 있습니다. 해커톤을 서로 다른 직군간 교류의 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해커톤은 통상 컴퓨터 프로그래머 위주인 행사이지만 카카오는 전 직군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사내 커뮤니티를 통해 팀을 이뤄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대응/ 전 직군 ‘만남의 장’ 제공
이번 우승팀도 사내 커뮤니티의 해커톤 ‘구인글’을 통해 이어진 이들입니다. 심지현씨는 “평소엔 유관부서가 아니면 다른 직군과 서로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어 아쉽던 차였다”며 “해커톤을 통해 다른 직군들과 협업할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기간 집중 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새롭게 얻은 것들도 있다고 합니다. 개발자는 기획자를, 기획자는 개발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황동현씨는 “서비스 하나가 나오려면 통상 기획자·개발자·디자이너 등 여러 직군이 협업하는데, 해커톤은 한 명이 여러 역할을 해야 한다”며 “내 영역이 아닌 범위까지 일을 해보니 상대방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손정규씨는 “평소에 대부분의 서비스는 기획 단계에서 서비스 의도가 결정되고, 개발자는 이를 구현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해커톤에선 서비스 기획부터 큰 틀을 함께 만들 수 있었는데, 이는 기존엔 다른 곳에선 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현씨는 “하루종일 붙어서 협업을 하다보니 양쪽 직군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가더라”며 “‘이정도 시간에 이정도 개발은 어렵구나’ 등 현실화 가능성의 범위를 좀더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도전/ ‘스스로 도전하는’ 사내 문화 조성
대응/ “과업이 아니라 축제로”
회사의 니즈도 있었습니다. 자율적으로 도전하고, 각자 맡은 업무를 주도하는 사내 문화를 좀더 확고히 하려는 것입니다. 이번 해커톤을 기획·운영한 태스크포스(TF)의 김태진 TF장은 “서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좀 더 나은 서비스를 고민하는 것이 카카오가 표방하는 문화”라며 “해커톤은 이런 문화를 직원들이 깊이 있게 경험하는 장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대응/ “과업이 아니라 축제로”
카카오는 이를 위해 해커톤을 사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축제처럼 만들었습니다. 이번 해커톤을 맞아 판교아지트 내에 설치한 ‘아이디어월’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4시간 아이디어 공모전에 참여하지 않는 직원들도 부담 없이 의견을 적어낼 수 있도록 대형 판을 마련했습니다.
해커톤 TF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사팀이나 사내문화팀에 행사를 맡기는 대신 자원을 받아 TF를 꾸렸습니다. 김태진씨는 “현업 외에 따르는 가욋일인데도 총 20여명이 TF에 참여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이디어월을 제안한 박보성씨입니다. 전략기획실 소속인 그는 “기존엔 개발직군간 행사 느낌이 강했던 해커톤을 회사 전체의 축제로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같은 의도가 상당히 통한 분위기입니다. 황동현씨는 “코로나19 이후 회사에 이번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며 “작은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고 했습니다. 심지현씨는 “입사 이래 오프라인에서 이처럼 치열하게 협업해 본 것이 처음”이라며 “내가 살아있다는 에너지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도 해커톤이 '아이디어 뱅크'
이번 카카오 해커톤의 우승팀은 카카오톡의 투표하기 기능을 활용한 ‘약속잡기’ 기능을 제안했습니다. 모임 구성원들이 각자 참석할 수 있는 날을 선택해 빠르게 의견을 모을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입니다. 팀원들이 결혼식 청첩장 모임 등을 갈 때 날짜를 정하기 힘들었던 경험을 살려 개선점을 강구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 조치가 해제되고, 확산세가 점차 잦아들면서 약속이 많아질테니 이를 돕자는 취지입니다. 카카오 관계자는 “카카오의 실제 서비스에 접목하는 안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글로벌 IT 기업들 여럿도 해커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게 메타(옛 페이스북)입니다. 페이스북에서 이용자들이 즐겨 쓰는 '좋아요(Like)' 기능과 사진공유 서비스 등을 해커톤을 통해 발굴해 구현했다고 합니다. 직원들과 함께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기업들이 어떤 혁신 사례를 더 만들지 궁금해집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