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만에 만난 누이는 말했다. "소리를 청하셨다고요. 소리 좋아하는 이 치고 내력 없는 사람 없던디. 손님은 어떤 내력을 지녔소?"
긴 시간 누이를 찾아 헤맨 의붓동생 동호. 눈이 멀어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지나온 길을 묻는 송화. 각자의 소리를 찾아 오랫동안 떨어져 달려온 남매 사이엔 묵직한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이들을 다시 묶은 건 '소리'. 동호는 북채를 잡았고, 송화는 '심청가'를 목놓아 불렀다.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이다. 득음한 송화가 한을 토해내며 부르는 '심청가'는 기구했던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하며 가슴 한쪽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소리를 찾고 동호를 마주한 상황이 어쩐지 황홀하기도 하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서글프면서도 벅찬 한풀이를 보고 있자니 '이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10년 넘게 많은 관객을 울린 뮤지컬 '서편제'다.
'서편제'는 이청준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도 대중에 잘 알려져 있다. 소설 및 영화 '서편제'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뮤지컬 '서편제'의 반전 매력에 가장 놀랄 테다. 단순히 판소리 뮤지컬 정도로만 표현할 수 없는 다채로운 장르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리에 미친' 아버지 유봉 밑에서 자란 송화와 동호는 어머니를 잃은 후 유봉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판소리의 길을 걸었다. 동호는 아버지의 소리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미움과 증오를 건드린 건 꿈에 대한 억압이었다. 록 밴드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동호의 꿈을 아버지는 "서양 음악을 따라 하려는 것일 뿐 네 것이 아니다"고 일축했다. 결국 동호는 자신의 소리를 찾아 나섰고, 송화와도 갈라지게 됐다.
동호가 록 밴드에 합류한다는 설정과 함께 판소리 외에도 팝, 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서편제'를 채운다. 우리의 소리와 현대 음악이 스토리에 걸맞게 제 색깔을 내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영상과 조명, 힘 있는 판소리 등 한국적 정서에 젖어 들다가 이내 강렬한 현대적 배경과 록, 발라드 등이 등장해 뮤지컬적 요소를 충족시킨다. 이는 각자의 소리길에 오른 송화, 동호의 대조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초연부터 작품을 진두지휘한 이지나 연출이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윤일상 작곡가, 조광화 작가, 김문정 음악감독, 이수인 연출 등이 의기투합해 시각·청각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구현해냈다.
이자람은 송화 그 자체다. 국악인 내공이 탄탄한 그의 진가는 송화가 동호를 그리워하며 소리를 포기하려 하자 아버지 유봉이 눈을 멀게 만드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일반적인 뮤지컬 넘버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극 초반부 거친 이자람의 목소리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한이 쌓여가며 이는 곧 깊고 진한 에너지로 변모한다.
자기 눈을 멀게 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고통, 이후 아버지를 여의며 느낀 좌절과 슬픔까지 송화의 서사에 맞춰 소리의 농도를 조절하는 이자람의 능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 말 무슨 뜻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다"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했던 말로 동호를 위로하던 따스하고 밝은 기운의 송화는 그렇게 인생을 가로막은 숱한 한을 가슴에 품고 진정한 소리꾼으로 거듭났다.
2010년 초연된 '서편제'는 다섯 번째 시즌인 이번을 끝으로 12년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뮤지컬적 재미는 물론, 우리 소리의 매력까지 한 데 느끼게 해준 '서편제'는 의미 있는 창작 뮤지컬로 단연 손꼽힌다. 송화의 인생이 남긴 긴 여운처럼, 12년간 관객들과 걸어온 소리길은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을 테다. 그렇기에 힘찬 박수로 보내줄 수 있는 작품이다. 굿바이, '서편제'.
공연은 오는 10월 23일까지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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