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조업체들의 재고 증가 추세가 일시적인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경기 침체'를 향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기 회복을 기대하고 생산량을 늘렸으나 소비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으면서 재고만 쌓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고 증가가 지속되면 기업들은 자연스레 신규 투자를 꺼리게 된다. 경기 하강기의 입구에 접어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16일 대한상공회의소(회장 최태원)가 발표한 '기업활동으로 본 최근 경기 상황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제조업 재고지수(계절조정)는 작년 2분기와 비교해 18.0% 뛰어올랐다. 분기별 증감률 기준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2분기(22.0%) 이후 26년 만에 가장 높은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기업 재고는 경기 변동에 따라 늘고 줄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한상의는 최근 재고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최근 재고 증가 흐름은 작년 2분기 이후 4개 분기 연속 상승했다"며 "분기 기준으로 장기간 재고지수가 상승세를 보인 것은 2017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재고자산 증가세는 대기업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대한상의가 한국평가데이터에 의뢰해 제조업체 상장기업(약 1400곳)의 재고자산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장 대기업 재고자산은 작년 2분기 61조4770억원에서 올해 2분기 89조1030억원으로 44% 불어났다. 같은 기간 상장 중소기업 재고자산은 7조4370억원에서 9조5010억원으로 28% 증가했다.
재고지수 증감률로 비교하면 대기업의 재고 증가가 더욱 확연하다. 통계청 산업활동동향에 따른 대기업 재고지수 증감률은 작년 2분기 -6.4%에서 올 2분기 22.0%로 치솟았다. 중소기업 재고지수는 이 기간 1.2%에서 7.0%로 상대적으로 변화폭이 크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지난 6월말 재고자산은 모두 52조922억원어치로 작년 말(41조3844억원)보다 10조7000억원어치 가량 늘어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제조업 전체로 보면 전년 동기 대비 2분기 재고자산은 39.7% 증가했다. 세부 업종별로는 ‘비금속 광물제품’(79.7%), ‘코크스·연탄 및 석유정제품’(64.2%),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58.1%), ‘1차 금속’(56.7%) 등의 재고자산 증가율이 특히 높게 나타났다. 재고자산 물량이 가장 많은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의 경우 전체 제조업 재고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년 2분기 24.7%에서 올해 2분기 27.9%로 비중이 확대됐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대한상의는 보고서에서 “최근 재고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작년 하반기부터 코로나19 특수 대응 차원에서 공급을 늘렸고, 국제유가·원자재가격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이 원자재를 초과 확보해 제품 생산에 투입한 데다 글로벌 공급망 차질로 인해 제품 출하가 늦어진 것이 기본 원인”이라며 단기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업들이 글로벌 수요가 증가하면 곧 이런 문제들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수요 증가가 생각보다 난망하다는 점이다.
대한상의는 "제조업 생산지수와 출하지수가 4개 분기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출하의 감소폭이 생산 감소폭보다 더 커 생산-출하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글로벌 인플레이션, 미국 금리 인상 등으로 수요 기반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상의는 현 상황을 기업들이 판매 부진에도 생산을 탄력적으로 조정하지 못하고 '오버슈팅'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3분기부터는 생산 감소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정부가 최근 무역수지 개선, 중장기 수출경쟁력 강화 지원 등 수출 종합 전략을 발표한 만큼 이를 조속히 실행에 옮기는 한편, 내수 진작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반기 중 마련·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채산성 악화가 생산 감소, 고용·투자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규제·노동·금융·교육 등 구조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의 고비용 구조를 개선해 나가는 것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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