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남녀 무용수가 차례로 텅 빈 무대에 등장한다. 저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반복하며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한다. 곧이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된다. 자아도취에 빠진 무용수들이 무대 바닥을 뒹굴거나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이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은 ‘춤’보다 ‘몸부림’에 가깝다. 약 한 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원시적인 움직임이 빚어내는 숨소리와 비명, 땀방울이 무대 위를 가득 메운다. 다소 충격적이고 낯선 장면에 객석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시댄스)는 지난 1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유령들’로 막을 열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등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예술감독 김보라가 안무를 맡은 ‘유령들’은 ‘무엇이 몸을 춤추게 하는가’란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올해로 25회차를 맞은 시댄스의 기획 ‘춤에게 바치는 춤들’ 주제를 상징하는 공연이다.
이번 축제의 주제를 ‘춤에게 바치는 춤들’로 정한 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무용 속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춤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취지다. 현대무용은 마치 현대미술처럼 추상적이고 해석이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직관적이고 서사가 있는 고전발레보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종호 시댄스 예술감독은 “그동안 난민 등 사회·정치적 주제를 특집으로 다뤄왔지만 올해는 ‘춤의 본질’을 탐구하는 주제를 선정했다”며 “신체적인 춤부터 개념적인 춤, 융복합적인 춤 등 현대무용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 설명했다.
지난 14~15일 개막작 ‘유령들’의 공연을 마친 안무가 김보라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번 작품은 안무를 일부러 ‘부수는’ 작업이었다”며 “우리는 과연 춤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움직임 자체에 도취되는 돌발 상태도 춤의 범위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국립무용단의 스타 무용가이자 안무가 김미애의 작품 ‘여 [女] 음’은 한국무용에서 출발해 ‘춤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김미애는 앞서 1997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다. 이번 작품은 무용수로서 춤과 삶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과 방향성을 담은 독무(獨舞)다. 전통 음악에 맞춰 추는 살풀이춤을 비롯해 피아노, 카운터테너 등 서양 음악에 맞춰 여러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공연 중간중간 직접 찍은 인터뷰 영상이 곁들여지면서 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무용수의 고민이 드러난다. 영상 속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거짓 없는 춤을 추고 싶다’는 김미애의 고백은 객석에 다다라 춤의 본질에 대해 답한다.
오는 26일엔 포르투갈의 안무가 조나스 로페스와 란더 패트릭의 ‘바트 파두(BATE FADO)’가 서울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펼쳐진다. 두 사람의 작품은 음악에 중점을 두고 다양한 장르의 공연예술을 융합하는 특징이 있다. 파두(Fado)는 1820년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탄생한 음악 장르다. 초기에는 노래와 춤이 함께였으나 점차 노래 위주로 정착됐다. 이번 작품은 파두 속 잃어버린 춤을 찾는 과정이다. 탭 댄스에서 영감을 얻은 춤으로 박진감 넘치는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무용수와 라이브 연주자 등 총 8명이 출연하는 춤과 음악 콘서트가 결합된 형태의 공연이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안무가 겸 무용수 전인정이 만든 무용단 파란코끼리의 ‘진동축하’는 불교악기 바라와 피아노가 함께 만드는 무대다. 동양과 서양 악기의 조화에 맞춰 무대는 일종의 주술이 펼쳐지는 장으로 변한다. 조상신이 아닌 춤의 신을 부르는 주술이다. 다음달 2일 서울 성산동 문화비축기지에서 공연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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