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랬어요. 시집을 낸 직후엔 시를 거들떠보기도 싫어지는 거요. ‘마음을 다 쏟아냈으니까 그런 거지’라고 매번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더라고요. 자꾸만 시를 더 쓰고 싶어지는 겁니다. 50년 만에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저도 신기합니다.”
얼마 전 등단 50년 기념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낸 정호승 시인(72)을 만나 출간 소감을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이번 시집은 그의 열네 번째 시집이다. 정 시인은 문단에 몇 안 되는 ‘스타 시인’이다. 그만큼 대표작도 많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는 시 ‘슬픔이 기쁨에게’부터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즐겨 읽는다는 ‘수선화에게’까지.
그래도 그는 아직도 쓰고 싶은 시가 많다고 했다. “저처럼 오래된 시인은 우물과 같아요. 자꾸 물을 길어내지 않으면 우물이 말라버립니다.” 시집에 실린 시 115편 중 9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번에 새로 낸 작품이다.
이번 시집의 핵심 주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첫 번째 수록 시 ‘낙과(落菓)’를 비롯해 ‘낙곡(落穀)’ ‘수의’ 등이 그렇다. “죽음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려보세요. 죽음이 그려지지 않나요. 시는 이런 ‘구체적인 비극’ 속에서 태어납니다. 시를 통해 비극은 비극대로 기록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위로를 건네려 합니다.”
그가 말하는 죽음은 종착지가 아니다. 육신은 사라져도 그 사람이 만들어낸 감정은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정 시인은 “사람에겐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자식들은 부모님이 생전에 보여준 사랑을 기억하며 살지 않느냐”고 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그가 죽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그는 시인의 삶도 같다고 했다. 시인은 죽어도 시는 남는다는 것. “내가 한알의 낟알로 땅에 떨어져/고요히 기도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너의 가난을 위해서다”(‘낙곡’)라는 시에 그런 마음이 담겼다. 시인은 죽음을 노래하는 시로 독자의 삶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모과’도 그런 시다. 그는 어느 가을날 집 앞 나무에서 떨어진 모과를 주우면서 시인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지에서 떨어졌다는 건, 모과 입장에선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향기를 내뿜죠. 시인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육신이 썩어 문드러져도 제가 남긴 시에선 계속 향기가 나기를 꿈꾸는 거죠.”
시인과 독자, 죽음과 영원한 삶을 얘기해서였을까. 인터뷰 말미에 정 시인은 “인터넷이 자꾸 내 시를 죽인다”고 했다. 내용이 틀린 시, 다른 시인의 시, 심지어 산문을 행갈이 해 짜깁기한 글이 ‘정호승 시’라고 버젓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가짜 시’가 책이나 기사에 인용되기도 하고, 붓글씨로 써 정 시인이 선물 받는 웃지 못할 일도 겪었다고.
“틈틈이 포털 사이트에서 ‘정호승’을 키워드로 검색한 뒤 잘못된 시를 발견할 때마다 일일이 메일을 보내요. 하지만 유튜브 영상이나 제가 모르는 SNS에 올라오는 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시는 신뢰할 수 없어요. 서점에서 시집을 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도서관에 가면 시집을 얼마든지 빌려 볼 수 있으니, 시인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원문을 읽어줬으면 합니다.”
그는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은 외롭고 배고픈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시인의 의무는 죽기 직전까지 시를 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인이라는 말 자체에 영속성이 있죠. 전(前) 장관, 전 교수는 있어도 전 시인은 없잖아요.”
정 시인에게 시 쓰기는 독자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 시인은 교사 기자 등 여러 직업을 거친 끝에 시인의 길을 걷게 됐다. 소설을 쓰겠다고 방황한 시간도 짧지 않았다. 그는 “1990년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를 출간한 지 7년 만에 다음 시집을 냈는데,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은 덕분에 계속 시를 쓸 수 있었다”며 “독자 없이 시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번 시집 ‘시인의 말’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시를 사랑해준 독자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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