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나무…'자연의 물감'으로 다시 자연을 그리는 '흙의 작가'

입력 2022-10-02 18:10   수정 2022-10-03 00:16


장화를 신은 작가가 싸리비로 만든 커다란 붓을 집어 들고 캔버스 위를 넘나든다. 흩뿌려진 물감은 흐르는 강물이 되고, 거대한 파도가 되고, 대지가 된다. 때론 우주의 어떤 행성이 되기도 한다. 이 작가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흙의 작가’ 채성필(50)이다. 그의 물감은 모두 자연에서 왔다. 흙과 나무 등에서 채취한 색으로 천연 안료를 직접 만들어 일반 물감에서 볼 수 없는 오묘한 흙색과 청색, 녹색을 만들어낸다.

지난달 30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한 그의 개인전 ‘경계, 흙으로부터(Boundary, From the Earth)’에는 주요 작품 60여 점이 걸렸다. ‘익명의 땅’ ‘물의 초상’ ‘흙과 달’ 등의 최신작은 다른 작가들이 자연의 모습을 모방하거나 재해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재료는 물론 기법이 독창적이다. 그는 만물의 근원물질을 설명하는 서양의 ‘4원소설’과 동양의 ‘오행설’이 모두 흙을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해 작업해온 작가. 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에 해당하는 다섯 개 우주 원소를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삼아 화폭에 원초적 자연의 공간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과정에서 채성필은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캔버스에서 자연에서 온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우연의 효과’를 추구한다. 그는 진주를 곱게 갈아 만든 은색의 가루를 캔버스에 수차례 칠하고 그 위에 진흙을 맑게 거른 물을 덧바른다. 흙물이 마르기 전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먹물을 뿌린 뒤 이를 다시 세우거나 기울여 흐르는 물길을 만든다.

채성필은 1998년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로 건너가 현재 파리1대학 조형예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향수이자 자연의 근간이 되는 흙에 집중하면서 한국의 고흥, 해남이나 여행 중 머물렀던 곳의 흙을 가져다 10여년 전부터 작업했다. 동서양에서 보편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업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파리시청, 피노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세르누치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색 스스로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채성필의 작업 방식 자체가 자연을 닮았다”며 “단색으로 거침없이 그린 그의 그림들은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의 시각적 은유”라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23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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