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환경 변화가 상사업체들에 우호적인지 확인하기에 앞서 지난 수십년간 이어져 온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상사업체들이 어떤 변신을 꾀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상사업체들이 갖추고 있는 경쟁력은 과거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먼저 상사업체들의 지난 20여년간의 행보를 살펴보자.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상사업체들은 한국 수출의 첨병 역할을 맡았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반대로 소련 붕괴 이후 세계화가 태동해 발전하던 시기였고, 한국 수출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많은 한국 제조 기업의 수출 통로가 부족했기 때문에 다양한 지역에 수출선을 확보하고 있던 상사업체들에는 이런 환경 변화가 사업 확장과 기업가치 제고의 기회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에 적응한 많은 수출 기업들이 상사업체들을 활용하는 대신 자신들의 판로를 스스로 개척해 직수출을 늘리기 시작했다. 상사업체들에 더 이상 전통적인 트레이딩 사업만으로는 성장을 일궈 내기가 어려운 환경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했다.
2000년대 들어 상사업체들은 가치사슬의 확장을 꾀했다. 원자재 트레이딩이 전통적인 사업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원자재 자체에 직접 투자해 트레이딩 물량을 스스로 구축해 가격 상승의 수혜도 함께 누리며 성장을 추구하는 전략이었다. 당시 중국은 글로벌 시장 내 제조기지로 중국발 원자재 수요 증가가 눈에 띄던 시기였다. 따라서 꾸준히 상승하는 원자재 가격을 바라보며 많은 국내 상사업체들의 철광석과 석탄, 기초금속이 생산되는 광산이나 원유, 가스 등이 생산되는 광구에 직접 지분을 투자하는 형태로 가치사슬을 확장했다. 이런 새로운 전략의 추구는 상사업체들이 다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새로운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2010년대 들어 국내 상사업체들은 각자 갈 길을 가고 있다. 최근까지 국내 상사업체들의 영업이익에서 전통적인 트레이딩 사업 영역은 최대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업체마다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 영역도 제각각이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성공적인 생산을 통해 이익 창출이 본격화된 미얀마 가스전이, LX인터내셔널은 돈을 들여 인수한 물류사업(판토스)이, SK네트웍스는 전통적인 트레이딩 사업과는 전혀 무관한 B2C 영역의 차량 및 가전 렌탈 사업이 각각 이익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들이었다. 2010년대 상사업체들의 성장 전략에서 전통적인 트레이딩 영역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2020년대 들어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굳이 따지자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경험했던 석유 파동(원자재 공급 부족 및 에너지 산업의 변화)과 냉전시대(자국 우선주의)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40년 만에 나타난 변화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이미 여러 나라들이 앞다퉈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다른 기업들에 그렇듯 상사업체들에도 위기로만 여겨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국 우선주의의 강화는 곧 일반 제조업체들의 직수출이 어려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때에는 전통적인 트레이딩 영역에서 꾸준히 경쟁력을 갖춰온 상사업체에 오히려 더 많은 사업 기회가 올 수 있다. 공급 과잉으로만 여겨지던 원자재 시장이 10여년간의 투자 부족으로 인해 오히려 공급부족 현상을 자아낼 수 있다. 원자재에 투자해 버텨왔던 상사업체나 혹은 최소한 전통 트레이딩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원자재 조달 능력을 꾸준히 배양해 온 상사업체가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에너지 산업의 변화기에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상사업체라면 금상첨화다. 전기차 소재 조달 및 신재생 에너지 발전 구축에 필요한 역량을 갖춘 업체, ESG 트렌드 강화 속에서 전통 에너지원임에도 불구하고 과도기 국면에서 필요성이 더 높아질 수 있는 천연가스 및 원자력 발전 분야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업체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역량이 부족하면 적극적으로 해당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상사업체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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