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은 베네치아만의 독보적인 순례 패키지였다. 지금처럼 외국 여행이 쉬운 시대가 아니다. 절차는 복잡했고 그거 하는 동안 몇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간다. 베네치아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통행증과 허가증, 그리고 숙박과 통역 등의 서비스 일체를 제공했다. 여행 허가증은 셋이다. 교구 사제가 발행하는 허가증, 교황이 발부하는 허가증, 그리고 마지막이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이다. 교황의 허락 없이 순례를 갔다가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를 발부받으려면 로마까지 발품을 팔아야 한다. 기독교도가 맘루크 제국까지 허가증을 받으러 간다? 명백히 미친 짓이다. 베네치아 패키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이 중 교구 사제 허가증만 받아오면 됐다. 베네치아는 교황과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을 책임졌고(수수료가 오간 것은 물론이다) 순례자가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순례선단 사업 독점 150년 동안 매년 수천 명이 순례 관련으로 베네치아를 찾았다. 1인당 운임은 그 시기 꽤 수입이 괜찮았던 조판공의 2년 치 월급이었다.
기독교도에게 예루살렘이 있다면 무슬림에게는 메카가 있다. 하루 다섯 번 이들이 엎드려 기도하는 방향이 메카로, 피처폰 시절 중동에서 LG전자가 자동으로 메카 위치를 알려주는 ‘메카폰’을 출시해 대박을 터뜨린 일은 유명하다. 무슬림에게 성지순례는 기독교도보다 훨씬 결사적이다. 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메카를 방문하는 순례자는 얼마나 될까. 2010년 기준으로 이슬람 인구수는 16억 명이다. 이 중 2%만 메카를 방문해도 매년 3200만 명이 성지를 찾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메카 순례를 마친 사람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는다.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 메디나까지 방문하는데 거기에는 무함마드의 묘가 있다. 항공료를 제외하고 1인당 체류 비용을 1000달러로만 계산해도 45조원 가까운 관광 수입이 생긴다.
순례도 결국은 여행이고 관광이다. 2017년 사우디는 메디나 북쪽 타부크 지역에 미래형 스마트 도시 건설을 발표했다. ‘네옴(NEOM)’이라는 이 도시는 서울의 44배 면적으로 야심만만한 세 개의 건축 프로젝트가 하위 메뉴에 들어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길이가 무려 17km에 달하는 유리 도시 ‘더 라인(The Line)’이다. 이 도시의 건설이 메카~메디나~네옴으로 이어지는 사우디 대규모 관광사업의 일환임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다. 사우디는 이렇게 성지순례와 관광을 결합한 프로젝트로 종교와 세속적인 이익 사이에 다리를 놓으며 수니파 맹주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중이다.
이슬람의 또 다른 분파 시아파는 어떨까. 시아파 맹주국인 이란의 마샤드에는 8대 이맘(이슬람 지도자) 레자의 무덤이 있고 연간 1200만 명 정도가 이 도시를 찾는다. 메카에는 한참 밀린다. 시아파 전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샤드의 확장 여지는 충분하다. 메카처럼 보편적인 성지는 없지만 대신 이란에는 고대와 중세 페르시아 제국의 유적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17세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는 이스파한은 여전히 우아하다.
그러나 이란은 성지순례를 정말 성스러운 종교의식으로만 남겨두고 싶은 모양이다. 어느 각도로 봐도 이 유산들을 활용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히잡(스카프)을 불량하게 썼다는 이유로 경찰이 여성을 체포하는 나라가 이란이다. 히잡은 진작에 벗어 던졌고 여성 축구팀까지 있는 사우디와 제대로 비교된다(사우디도 몇 년 전까지는 여성의 축구장 입장이 불가였다). 이런 무서운 나라를 좋다고 찾아갈 사람은 없다. 이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핵이 아니라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종교적인 편견이 들어있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던 그 말에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남정욱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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