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번역 산업은 빅테크의 영역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구글, 국내에서는 네이버(파파고)가 입지를 탄탄히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자료 조사, 외국인과의 대화 등 일상적인 번역까지 해결해준다. 그렇다고 스타트업의 설 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빅테크가 해결하기 어려운 버티컬(전문) 영역은 스타트업의 전장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맥락과 문화, 기원 등을 따져야 하는 음식점 메뉴판이다. 단순 번역에 맡겼다가는 육회를 ‘six times’, 곰탕을 ‘bear stew’로 번역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AI 번역 스타트업 플리토는 최근 메뉴판 번역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 서비스는 QR코드 기반 다국어 번역 서비스(사진)다. 음식 메뉴판, 관광 안내문 등 번역이 필요한 곳에서 QR코드 스캔으로 정확한 번역문을 제공한다. 여의도 더현대서울 등 대형 쇼핑몰 등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아랍어 등의 언어를 제공한다.
2012년 설립된 플리토는 집단지성 기반 번역 플랫폼을 운영했다. 이 모델로 플리토는 2019년 사업모델 특례 상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이 AI 기반 번역 서비스를 고도화하면서 다른 사업 모델을 찾았다.
메뉴판은 식자재, 지역명 등 고유명사 때문에 단순 자동 번역으로는 부족했다. 기사, 논문 등 일반적인 텍스트보다 음식 메뉴는 텍스트 데이터가 충분치 않았다. 손글씨로 작성되거나 세로형 텍스트도 많아 관련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웠다.
플리토는 사람과 기계의 협업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플리토는 AI 번역과 사람 번역가의 검수를 통해 정확한 메뉴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자체 AI 번역 엔진은 간단하고 반복적인 번역을 맡고 문화와 맥락의 이해가 필요한 번역은 자체 전문가가 맡아 완성도를 높였다. 예를 들어 돌문어해물삼합을 파파고는 ‘Stone Octopus Seafood Samhap’으로 직역한다. 플리토의 메뉴 번역 서비스는 ‘Octopus Seafood Samhap(three delicacies)’으로 번역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관련 콘텐츠의 현지화 수요도 급증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의 스타트업 엑스엘에이트에이아이는 번역가를 위한 업무툴까지 제공한다. 이 회사의 목표는 ‘번역가들의 포토샵’이다.
엑스엘에이트가 지난달 출시한 영상 번역 서비스 미디어캣은 영상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대사를 추출해 타임코드를 맞추고 원하는 언어로 대사를 번역해 더빙 작업까지 지원한다. 전문 번역가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인형 눈 붙이기’처럼 단순 반복 작업이던 타임코드 작업을 처리해 작업 효율을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회사의 강점은 많은 영상 자료를 학습해 존댓말 등 구어체 번역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엑스엘에이트가 번역한 영상 콘텐츠 분량은 50만 시간을 넘어섰다. 번역한 단어는 24억 개, 지원하는 번역 언어 쌍의 종류는 66개다. 정영훈 엑스엘에이트 대표는 “구글이 이미 진출한 머신번역(MT) 시장에서 스타트업이 어떤 강점을 지닐 수 있을까 연구한 결과 시장 세분화를 통해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텍스트 데이터가 많은 법률 분야도 AI 번역 서비스가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의 투자를 받은 베링랩은 법률·특허 AI 번역 서비스를 운영한다. 베링랩은 특정 전문 분야의 데이터를 집중 학습해 해당 분야에서 범용 번역 엔진보다 높은 성능을 자랑한다. 법률, 특허,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에이아이링고는 AI를 활용한 국문과 영문 법률 자료 및 판례 번역 서비스도 제공한다. 사람이 작업하면 10시간이 필요한 문서도 1분 만에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에이아이링고는 개별 로펌이 이용하는 단어를 AI에 학습시켜 맞춤형 서비스도 지원 중이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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