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사람들의 우울증을 해소해 주는 게 예능이죠. 웃옷을 벗고 관음증을 해소해 주는 건 능욕입니다."
파격일까, 도발일까. '잠만 자는 사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예능프로그램의 등장에 반발 여론이 심상치 않다. 연애 예능의 인기에 편승해 선정적인 소재로 관심을 끌려는 자극적 콘텐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내 OTT 웨이브는 최근 새 예능 '잠만 자는 사이'의 예고편을 공개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타 연애 예능과의 차별점으로 밤 시간대 이성들의 관계를 살펴본다는 점을 내세웠다. 예고 영상에서는 남녀가 잘 때의 버릇 혹은 성적 취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성의 신체를 만지거나 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 등이 그려졌다. 일부 출연자는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웨이브 측은 '요즘 자만추는 자보고 만남 추구? 쉽지 않은 MZ들의 사랑법. 밤사이 벌어지는 시크릿 밤 데이트. 연애 세포 깨울 준비 완료'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기존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의 줄임말로 알려진 '자만추'를 '자보고 만남 추구'로 재해석했다.
상상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장면과 멘트로 구성된 영상을 접한 네티즌들은 "선을 넘는다", "조금 수위가 올라간 예능이 잘 되니까 결국 여기까지 오는구나", "자극적인 소재로 방송을 제작하면 주목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 "이런 예고편은 청불(청소년관람불가) 설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했다.
'나는 솔로', '돌싱글즈', '환승연애', '솔로지옥', '에덴' 등 비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짝짓기 예능프로그램이 인기 상승세에 힘입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상황. 그 가운데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위해 자극적인 설정이 많아지며 반감 여론도 커지는 모양새다.
특히 '잠만 자는 사이'는 시크릿 밤 데이트를 MZ세대의 연애 방식이라는 식으로 특정해 논란을 부추겼다. 웨이브 측은 "기존 연애 예능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밤 시간대를 집중 조명한다"면서 이를 'MZ세대들의 솔직하고 과감한 핑크빛 본능'이라고 소개했다. 이에 MZ세대를 지칭해 이들이 모두 '잠만 자는 사이'의 연애를 하는 것처럼 표현한 게 불쾌하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연령 제한에서 다소 자유로운 온라인 콘텐츠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사에서 자체적으로 시청 가능 연령 등급을 정하더라도, 추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받을 수 있어 선정적인 장면 연출에 조심스러운 편이다.
반면 OTT 콘텐츠는 비디오물로 분류돼 영화와 같이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등급 분류를 받는다. 관람 등급이 확정된 후 콘텐츠가 공개되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자극적인 소재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수렴해 반영할 수 없다. 방심위의 감시권 밖에 있으니 사실상 관람 등급만 결정되면 그 이후로 눈치를 봐야 할 환경이 일절 없다는 뜻이다.
영등위 등급 분류 검색 결과, 현재 '잠만 자는 사이' 1~4회는 '15세 이상 관람가'로 분류됐다. 영등위 측은 "8명의 남녀가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오직 밤에만 이뤄지는 데이트로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을 다룬 영상물"이라면서 "욕설, 비속어도 등장하나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수준이며 음주 요소도 전체 맥락상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선정성 부문에서는 1~2회 '12세 이상가', 3~4회 '전체 관람가' 판단이 나왔다. 콘텐츠가 전부 공개되어야 정확히 알겠지만,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의 '대중적 반응'과는 상반된다. 영등위의 기준인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수준'에 대한 물음표가 남는다. 전체 내용이 선정적이지 않다면, 무리해서 자극적으로 편집한 예고편 자체도 문제가 될 테다. 공개된 예고편은 상당히 수위가 높은 편임에도 유튜브 등에서 별다른 시청 연령 인증 없이 볼 수 있다.
OTT 업계는 지속해서 '자율등급제'를 요구해온 끝에 내년 4월부터 콘텐츠 등급을 자율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됐다. 지난달 OTT 자율등급제를 골자로 하는 '영화·비디오물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 이에 영등위로부터 등급 분류를 받은 후 콘텐츠를 공개하던 사전심의제에서 사후심의제로 바뀌게 된다.
그간 사전심의제 때문에 콘텐츠 공급 일정이 미뤄지는 등 속도와 수익성 측면에서 해외 OTT에 비해 불리하다고 주장해왔던 업계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청소년들이 유해 콘텐츠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따른다. '잠만 자는 사이'와 같은 사례는 이러한 걱정을 더욱 키우는 요소가 되고 있다.
중학생 자녀를 둔 40대 A씨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동영상을 검색해서 보는 시대이지 않냐. 결제하지 않고도 유튜브 등을 통해 손쉽게 각종 콘텐츠에 노출되기도 한다"면서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아이들이 이미 다 본 콘텐츠가 추후 심의를 통해 조정되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느냐. 애당초 제작사나 연출자가 본편은 물론 예고편까지 두루 책임감을 갖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정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할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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