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A 씨(30)는 입사 동기의 권유로 2020년 1월 암호화폐 투자를 처음 시작했다. 회사 봉급으로 모은 1500만원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모두 투자한 A 씨는 1년 6개월 만에 30억원 넘는 돈을 벌고 지난해 6월 회사를 나왔다. A 씨는 “큰돈이 생기면서 일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니 결국 주변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A 씨는 최근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은퇴 당시만 하더라도 앞으로 일하지 않고 암호화폐 투자 수익으로만 살겠다고 결심했던 A 씨는 일을 그만둔 뒤 자신이 더 불행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취미활동도 잠깐일 뿐 일과 없는 삶 속 ‘식물인간’처럼 지내며 우울증까지 찾아왔다”고 털어놨다. A 씨는 “은행 이자만으로 살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모으면 무조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결국 환상이었다”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암호화폐 투자로 큰돈을 번 뒤 본업을 그만둔 20~30대 ‘코인 파이어족’ 12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과반인 아홉 명은 ‘사회 복귀’를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전업투자자(3명), 책 집필·강연 등 대외활동(4명), 창업(2명) 등의 활동을 하는 동시에 재취업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나머지 3명도 내년에 직업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은퇴 후 직업 활동 없이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여 경제적 자유를 누린다는 파이어족에 대한 통념과는 반대된다. 파이어(FIRE)란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약자로 젊은 나이에 큰돈을 모아 경제적으로 자립한 뒤 조기 은퇴하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코인 파이어족들은 ‘경제적 자유’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은퇴 후 창업의 길에 들어선 한정수 씨(30)가 대표적이다. 신한카드 홍보팀에서 근무한 한 씨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투자해 30억원 넘는 돈을 벌고 지난해 3월 사직서를 낸 뒤 최근 웹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는 회사를 세웠다. 평소 ‘K콘텐츠’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다는 한 씨는 “투자는 투자일 뿐, 일은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인 파이어족들은 올해 암호화폐 시세가 떨어졌음에도 코인 보유 비중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은퇴 당시의 자산가치를 지켰다. 전체 자산 중 암호화폐로 보유한 자산의 비중은 10% 이하 4명, 10% 초과 30% 미만 4명, 30% 초과 50% 이하 3명이었다. 코인 파이어족들은 주식·부동산에 투자해 현금흐름을 확보하거나 현금 보유 비중을 늘렸다. 자산의 전부를 암호화폐로 보유하고 있다고 답한 이는 2명에 불과했다.
전 재산을 암호화폐로 보유한 이들도 진입 시점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자산가치 하락을 피했다. 30억원 안팎의 코인 자산을 보유한 강모 씨(34)는 지난해 말 코인 시장이 과열됐다고 보고 암호화폐 시장에서 철수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재진입했다. 강 씨는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단타매매로 자산을 더 늘렸다”고 했다.
투자에 입문한 계기는 ‘지인들의 권유’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2명 중 과반인 9명은 친구나 지인의 소개로 암호화폐에 투자에 손을 댔다고 말했다. 재테크를 공부하며 스스로 암호화폐 시장 진입을 결심했다고 응답한 이는 3명에 불과했다. 투자 시드머니도 1000만원 미만의 소액이 대다수였다. 300만원 이하가 6명으로 절반에 달했고 300만원 초과 1000만원 이하가 3명이었다. 암호화폐 투자를 위해 대출을 이용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3명에 그쳐 코로나19 확산 당시 저금리를 이용해 대출을 받아 투자에 나섰던 ‘빚투족’ ‘영끌족’과 대조를 보였다.
5년 남짓한 시간에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모은 코인파이어족이지만 소비습관은 오히려 검소했다. 이들은 자산이 불어날수록 오히려 사치품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경기도 의정부에서 만난 코인파이어족 신모 씨(35) 인터뷰 요청에 흰색 티셔츠와 반바지의 단촐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유년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김밥 장사부터 중고차 판매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는 그는 “투자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돈만 있다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차를 타며 뽐내고 싶었다”며 “오히려 돈이 많아질수록 사치품에 대한 욕심이 떨어지더라”고 말했다. 암호화폐로만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했지만 운동화를 모으는 취미 외엔 특별한 지출이 없다는 신 씨는 “자동차도 10년 넘게 동생과 같이 타고 다닌다”고 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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