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년 전 나무 위에 사는 침팬지 비슷한 동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무에서 내려와 걸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입니다. 지금 인류와는 여러모로 달랐지만, 이 종족은 대를 거듭하며 다양하게 진화해 나갔습니다. 그중 하나가 30만년 전쯤 우리가 속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현생인류)가 됐죠. 하지만 우리 조상들에겐 경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 격이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네안데르탈인입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와 전혀 다른 종족’이었습니다. 말과 당나귀, 호랑이와 사자처럼요. 하지만 2010년 스웨덴 출신의 스반테 페보 박사 팀이 내놓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로 상황은 반전됩니다. 한국인을 포함한 현대인 대부분이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2% 정도씩 갖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 조상님 중에 네안데르탈인도 있다는 겁니다. 진화의 비밀을 밝힌 공로로 페보 박사는 지난 3일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이후 많은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최신 연구들에 따르면 현생인류는 4만9000~5만4000년 전쯤 네안데르탈인과 피를 섞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에게 탈모, 비만, 당뇨 유전자를 남기고 갔습니다. 하지만 선물도 있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 능력, 코로나19에 대한 저항력을 비롯한 강인한 면역력도 물려줬거든요.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들 사이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아주 옛날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자가 20년 전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돌이켜보면 이렇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따뜻하고 먹을 게 많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진화도 여기서 주로 이뤄졌습니다. 새로 생겨난 종족들은 아프리카를 나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30만년 전쯤 ‘최종 진화 버전’인 현생인류가 태어납니다. 이들은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져나가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원주민들을 멸망시키고 지구의 주인이 됩니다. 명쾌하죠.
하지만 2010년부터 이런 상식은 뒤집혔습니다.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종류의 인간 종족이 공존했고, 수없이 피를 섞으면서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는 연구 결과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손톱만 한 뼈 한 조각에서도 유전자들을 정확히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발전한 덕분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특수 기법을 개발한 게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페보 박사 팀입니다.
데이비드 라이크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수류탄이 터진 방에서 잔해만 보고 원래 방의 정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게 가능해진 셈”이라고 비유합니다. 그는 페보 박사와 여러 연구를 함께한 세계적인 유전학자입니다. 2015년 네이처지가 선정한 ‘가장 중요한 과학자 10인’에 들기도 했죠. 이번 기사는 재작년 국내에 출간된 그의 저서 <믹스처>의 내용을 바탕으로 몇몇 연구 결과를 종합해 작성했습니다. 최대한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세 종족부터 소개합니다. 먼저 현생 인류, 우리가 속한 바로 그 종족입니다. 외모나 성격은 물론 국적이나 인종이 달라도 우리는 같은 종족입니다.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 DNA 전체로 보면 70억 인구가 비슷하다는 게 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그다음이 한때 현생인류와 같은 시간을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입니다. 40만년 전 나타나 3만9000년 전쯤 멸종했습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번성했고, 현생인류보다 키가 크고 힘이 셌습니다. 언어능력이 있는 건 물론이고 지능과 손재주도 뛰어났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13만년 전 독수리 발톱 장신구가, 프랑스 동굴에서는 18만년 전 원 모양의 돌담이 발견되기도 했죠. 환자를 돌보고, 노인을 공경하고, 시신을 정성스레 매장하는 문화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0만년 전쯤부터 3~4만년 전까지 존재했던 데니소바인입니다. 이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존재가 처음 알려진 건 2008년입니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어린이의 손가락뼈와 다리뼈, 어금니 화석이 발견됐죠. 워낙 남아있는 화석이 적어서 처음엔 네안데르탈인으로 오해했지만, 페보 박사와 라이크 교수의 DNA 분석으로 또 다른 종족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특이한 건 어금니가 탁구공만 했다는 겁니다. 화석을 발견한 사람들은 처음엔 곰의 이빨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채소를 주식으로 먹다 보니 이렇게 진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역시 우리의 조상 중 한 명입니다. 연구 결과 동아시아인의 피에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0.2% 정도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거든요. 호주 대륙 원주민 등의 DNA에는 최대 6%까지 섞여 있고, 아프리카나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소개를 마쳤으니, 이제 수만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겠습니다.
라이크 교수 등에 따르면 현생인류와 데니소바인, 네안데르탈인의 뿌리는 같습니다. 현생인류(아프리카)가 먼저 따로 진화를 시작했고, 유라시아 대륙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유럽)과 데니소바인(아시아)도 각자 환경에 적응해 나가며 진화합니다.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모두 똑똑했습니다. 개인으로는 약해도 뭉치면 강했죠. 특히 네안데르탈인은 등장하자마자 유럽의 주도권을 잡습니다. 중동과 아시아 쪽으로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3만년 전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전쟁보다는 동물들이 서식지에서 먹거리 쟁탈전을 벌이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싸움이 수만 년간 계속됐죠. 주도권을 뺏고 뺏기는 싸움 끝에 여기서는 네안데르탈인이 판정승을 거둡니다.
6만년 전쯤 현생인류 집단이 또다시 중동으로 뛰쳐나옵니다. 이번엔 달랐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퍼지면서 다른 종족들을 압도한 거죠. 네안데르탈인은 불과 1만~2만년 만에 멸종해버립니다. 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제기됩니다. 라이크 교수는 유전학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현생인류 수가 네안데르탈인 수보다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합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현생인류의 고향인 아프리카는 따뜻합니다. 웬만큼 기온이 떨어져도 먹고살 만합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의 본거지인 유럽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안 그래도 이들은 체구가 커서 밥을 많이 먹어야 했습니다. 연비가 나빴단 얘기죠. 동물들이 얼어 죽으면 네안데르탈인도 여럿이 굶어 죽습니다. 수가 확 줄었다가 몇 안 되는 남은 사람들끼리 짝을 짓는 게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전자의 다양성이 떨어졌고 안 좋은 돌연변이도 쌓였습니다. 종족의 수도 줄었죠.
5만4000년~4만9000년 전 현생인류가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피를 섞으면서 상황은 더 기울었습니다.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해져서 면역력이 강해졌고, 수가 더 늘었거든요. 한정된 먹거리를 현생인류가 싹쓸이하기 시작하면서 네안데르탈인은 도태됐습니다. 일부는 현생인류에 흡수됐고요. 경쟁자가 사라진 현생인류는 유럽과 아시아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현대인 대부분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중동을 정복한 이 집단의 후손입니다.
데니소바인은 화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자세히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밀려나고 멸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시아에 진출한 현생인류는 4만9000~4만4000년 전쯤 데니소바인과 피를 섞습니다. 다만 유럽이나 중동 등에 정착한 현생인류는 데니소바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죠. 데니소바인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주로 몰려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종마다 다르지만, 대다수 현대인의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 2%가량 남아있습니다. 한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유산이 비만, 당뇨, 탈모입니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사피엔스 순종’ 아프리카 부족들은 이런 문제를 거의 겪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눌러앉아 있었기에 네안데르탈인을 만난 적 없는 조상 덕을 봤죠.
다만 현대인이 아닌 조상들 기준으로는 비만과 당뇨 유전자가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을 겁니다. 춥고 배고픈 극한 상황에선 사실 이런 유전자가 있는 쪽이 유리합니다. 살이 잘 찌면 에너지를 많이 저장할 수 있습니다. 당뇨병도 마찬가지입니다. 혈당이 높으면 장기적으로 큰 타격을 받지만, 저혈당으로 움직이지 못하면 당장 목숨을 잃죠. 어차피 옛날에는 대부분이 당뇨 합병증이 오기도 전에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생존에 유리한 것만 받은 건 아닙니다. 탈모 유전자가 대표적입니다.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는 아시아 쪽에 남아있는데, 그들의 고산지대 적응 능력을 티베트인이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면역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다만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은 데니소바인 유전자 비율이 0.2%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특별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지금까지 수십만년간의 얘기를 요약해 봤습니다. 아득한 과거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라이크 교수의 주장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 중 하나인 건 분명합니다. 다음 주 이 코너에서는 같은 책을 통해 한국인을 비롯한 현대의 인종들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풀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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