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노 안주원 "진통제 투혼…돈키호테 끝내니 혼이 빠졌죠"

입력 2022-10-09 17:09   수정 2022-10-10 00:28


1939년 미국 뉴욕에서 설립된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는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과 볼쇼이발레단, 영국 로열발레단, 프랑스 파리 오페라발레 등과 함께 세계 최고 발레단으로 꼽힌다. ABT는 2020년 9월 창단 61년 만에 첫 아시아 남성 수석무용수를 뽑았다. 한국인 발레리노 안주원(29)이다. 그는 2014년 군무 단원으로 입단한 지 6년 만에 수석무용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ABT는 수습 단원을 포함해 92명의 무용수를 두고 있으며 수석무용수는 18명이다.

안주원은 군무 시절인 2018년부터 ‘라 바야데르’ 등에 주역으로 발탁돼 무대에 섰지만, 수석무용수 주역 데뷔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공연장 폐쇄로 약 2년을 기다려야 했다. ABT는 2020년 4월 봄 시즌 이후 중단한 공연을 지난 여름 시즌부터 재개했다. 수석무용수 승급 이후 첫 공연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안주원을 최근 뉴욕에서 만났다.

“시즌 시작 4주 전부터 연습을 시작했어요. ‘돈키호테’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 안무를 배우는 데 거의 시간을 써서 나머지 작품의 연습은 부족한 상황이었죠. 충분히 배역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무대에 오르다 보니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무척 긴장했지만, 다행히 첫 시즌을 무사히 잘 마쳐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는 ‘막내’ 수석 발레리노로서 고충이 컸다고 털어놨다. 부상으로 빠진 수석무용수들의 공연을 모두 도맡았기 때문이다. “출연 횟수가 ‘백조의 호수’는 1회에서 3회로, ‘돈키호테’도 1회에서 2회로 늘어났어요. 며칠을 연속해서 무대에 오르는 날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공연은 정말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으로 한 것 같아요.”

안주원 역시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돈키호테’ 리허설 도중 가슴을 다쳤다. 가슴뼈가 아파서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이미 부상자가 많은 상황에서 빠진다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진통제를 먹고 무대에 올랐다. 안주원은 “이번 시즌에 출연한 작품 중 가장 활기차고 재미있어야 할 ‘돈키호테’ 공연이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ABT 수석무용수 선배인 발레리나 서희(36)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2005년 ABT에 수습 단원으로 입단한 서희는 7년 만인 2012년 아시아인 최초로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수석무용수 10년 차인 서희 선배는 이미 다 해봤던 작품이었어요. 서 선배와 무대에 함께 설 때는 호흡을 맞추기가 정말 편했습니다. 무엇보다 말이 잘 통하니 의사소통이 잘됐어요. 다음 순서가 갑자기 기억이 안 날 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왔죠. 하하.”

강원 원주 출신인 안주원은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크고 싶어서 처음 발레를 시작했다고 했다. “발레학원에 남학생이 네 명이나 있어 다행이었어요. 여학생만 있는 학원도 많았거든요. 발레를 배우러 간다기보다 친구들과 놀러 간다는 생각에 학원에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친구들과 남자 동작을 함께 배우다 보니 재미가 붙었고, 은근한 경쟁심도 생겨서 발레를 열심히 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는 선화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2012년 입학했다. 한예종 2학년 때 뉴욕에서 열린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YGAP)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고, 이듬해 ABT에서 입단 제의가 왔다. 그는 “큰 고민 없이 뉴욕행을 택했다”며 “이런 기회를 날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안주원은 입단 5년 만인 지난해 9월 솔리스트로 승급했고, 1년 만에 수석무용수로 올라섰다. 그는 “수석으로 승급한 이후 발레단에서 별도 드레스룸을 주고, 의상을 챙겨주는 사람이 생긴 것 말고 달라진 것이 없다”며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안주원은 여전히 일본인 룸메이트와 같이 살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쉬는 날이면 ABT 동료들과 코리아타운에 가서 맥주와 치킨을 먹는다. 공연 전날이면 크림 파스타를 먹는 습관도 그대로다. 예전에 크림 파스타를 먹고 무대에 올랐을 때 공연이 잘된 이후로 생긴 징크스다. 그는 “지난 여름 시즌에 크림 파스타를 엄청나게 먹었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향후 계획을 묻자 “특별한 목표나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당장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제가 좀 무던한 편입니다. 주변 환경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스타일이죠. 매사에 긍정적이고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 고된 훈련, 언어 장벽, 외로움 등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뉴욕=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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