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동네재단이 보여준 공공개혁의 길

입력 2022-10-09 17:42   수정 2022-10-10 00:26

20년도 더 된 얘기다. ‘숨은 신의 직장’으로 꼽히는 공기업에 들어간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고민이야. 여기선 다들 하루에 끝낼 수 있는 일을 이틀에 나눠 처리하거든. 편하긴 한데, 경쟁력이 떨어질까봐 걱정이지 뭐. 더 늦기 전에 ‘빡센’ 민간 기업으로 옮겨야 하는 건지….”

친구는 회사에 남는 걸 선택했다. 이 결정으로 그의 경쟁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시간 부자’ 칭호는 지킬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만날 때마다 ‘저렇게 널널한 공기업을 정부는 왜 내버려두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피 말리는 실적 압박과 성과에 따른 보상 시스템이 없는 공공기관에서 방만경영과 복지부동은 태생적 한계니까.
'가동률 96%' 마포아트홀
그렇게 오랫동안 굳어진 공공기관에 대한 선입견을 최근 바꿀 일이 있었다. 서울 마포구 산하 마포문화재단의 올해 공연 리스트를 둘러보고서다. 살림살이도 넉넉하지 않은 ‘동네 재단’이 주민이 좋아할 만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이렇게 애쓰리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양(量). 이 재단이 다음달까지 여는 ‘M클래식 축제’에는 클래식 재즈 가요 등 27개 공연이 오른다. 한국 대표 음악 축제인 평창대관령음악축제(22회)보다도 많다. 질(質)도 높다.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와 지난해 세계적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를 제패한 피아니스트 박재홍, 그래미상을 받은 ‘클래식 기타의 거장’ 데이비드 러셀 등을 모셨다.

출연자 명단을 앞으로 돌려 보니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김선욱(5월)과 선우예권(7월)도 나왔다. 넘버원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은 지난 6월 최정상 재즈 피아니스트 배장은과 함께 마포의 밤을 달궜다. 지난달에는 국내 1호 가곡 뮤지컬인 ‘첫사랑’을 자체 기획해 무대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하는 문화' 만들어야
마포문화재단이 올해 자체 기획한 공연 수는 82회에 이른다. 전국 125개 기초자치단체 문화재단 중 압도적으로 많다. 그 덕분에 올해 마포아트센터 가동률은 96.5%(무대점검일·휴관일 제외)에 이를 전망이다.

직원들이 머리와 손을 부지런히 굴리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공연을 짤 수 없는 터. 궁금했다. 두둑한 인센티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송제용 대표의 답은 의외였다. “재미있어서, 보람 있어서 하는 거죠. 우리가 기획한 공연에 주민들이 울고 웃습니다. 한번 맛들이면 이만큼 짜릿한 것도 없어요.”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3년간 다른 문화재단에서 일하다가 지난해 합류한 한 직원은 이직 이유를 “일다운 일을 하고 싶어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렇다. 공공기관 직원들이 처음부터 복지부동일 리 없다. ‘일하는 재미’를 모를 리도 없다. 분위기에 휩싸여 ‘굳이’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민간보다 많았을 뿐이다.

마포문화재단은 직원들의 ‘자아실현 욕구’와 ‘일하는 재미’를 잘 살려내면, 공공기관의 ‘일하는 문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역대 어느 정부도 성공하지 못한 공공기관 개혁의 출발점이 바로 이 지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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