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군사용으로 전용되거나 인권 탄압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중국의 첨단 기술 경쟁력 확보를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화웨이와 같은 개별 중국 기업이 아니라 기술, 장비 등을 포괄적으로 규제한 것은 처음으로 미·중 갈등이 한층 격화할 전망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당초 우려와 달리 미국의 조치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중국 내 사업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중국에 공장을 둔 외국 기업에 대한 장비 수출은 개별 심사를 거쳐 허가할 방침인데, 한국 업체는 운영 중인 공장의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장비의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받았다. 우리 정부가 8월 말부터 미국의 동향을 파악해 상무부와 발빠른 협의에 나서는 한편 국내 반도체 기업과 공동 대응한 덕분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한·미 양국은 수출 통제 당국, 외교채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긴밀한 협의를 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한국 반도체가 미국 및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에서 갖는 의미와 유사시 영향 등을 상세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배제로 논란을 빚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때보다 적극적이고 적절한 대응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타격이 없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별도 허가 절차에 따른 사업 지연, 중국 내 사업 불확실성 증대에 따른 악영향은 피할 수 없는 만큼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미 정부 심사 과정에서 기술 유출 문제 등이 불거질 수도 있다. 특히 미국의 강도 높은 수출 규제로 중국 반도체 시장이 위축되면 매출의 40%를 중국에 의존하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면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더구나 지금은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세계 반도체 시장이 빙하기로 접어들고,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보다 31.7%나 급감한 위기 국면이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 통제는 그동안의 대중 규제 가운데 가장 세고 강력하다. 우리 기업이 생각지 못한 불이익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단기적으론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가 한국 반도체산업에 불확실성을 던져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멀리 내다보면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과도한 시장 의존도에서 벗어날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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