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교류에 있어서 기업과 대학의 '뉴 얼라이언스'가 필요한 때입니다."(홍유석 서울대 공과대학장)
"선진국에 비하면 한국은 여전히 '고군분투'에 그치고 있는 느낌입니다."(김태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글로벌 퓨처테크 현장을 가다'를 주제로 한국경제신문과 공동기획에 나선 서울대 공과대 교수진은 각 분야에서 한국이 기술 패권을 갖고 세계 각국에 맞서기 위해 "인력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약육강식'으로 요약되는 글로벌 기술 전쟁 속에서 한국이 국가적 전략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는 조언이 잇달았다. 조규진 기계공학부 교수는 "단순히 기술 자체를 넘어 교육과 연구, 창업이 하나가 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박동휘 한경 차장)기술 주권이 나라의 명운을 쥐고 있습니다.
△조용채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지난해 말 정도와 비교해봐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벌어지면서 유럽 나라들이 얼마나 에너지를 특정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됐죠. 반대로 말하면 기술 주권을 가진 나라는 그 분야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은 유럽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태현 교수=맞습니다. 양자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죠. 한국은 이 분야에서 크게 뒤쳐져 있습니다. 미국의 IBM 같은 기업과 비교하면 한국의 기술력은 5~10년 정도 떨어져있다고 봐야 합니다. 향후 양자컴퓨터가 전략무기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추세라면 한국은 이 분야 주권을 가진 나라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나라의 양자컴퓨터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우리 내부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셈이죠. 결국 미래가 문제라는 얘깁니다.
△김성재 전기정보공학부 교수=기술로 세상을 구한 모더나를 보세요. 이 회사 공동창업자인 로버트 랭거 교수는 창업만 마흔 번 넘게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교수가 수십 차례나 창업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MIT에는 바이오 벤처만 따로 육성하는 랩센트럴도 있고요. 거기 입주한 회사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가의 장비도 구비돼 있습니다. 그만큼 벤처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잘 잡혀 있어요.
▷창업 생태계도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김상범 재료공학부 교수=미국엔 반도체 소자 분야를 다루는 스타트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엔 반도체 설계 관련 스타트업들이 대부분이에요. 소자 쪽에서 힘을 쓰려면 생산 설비가 많아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비싼 장비들을 구하지 못해 연구실 단계에서 기술이 사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연구원들이 마음 편히 혁신적이고 파괴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도록 창업 인프라가 잘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최장욱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미국의 배터리 스타트업들을 보면 대부분 아이디어는 좋지만 '과연 이걸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확실한 제조 역량이 있잖아요. 게다가 한국은 대기업 위주로 차세대 배터리에 대한 연구를 매우 공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업 생태계가 잘 갖춰진다면 대기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배터리 스타트업도 많이 생길 겁니다. 그럼 한국이 한 발 더 앞서나갈 수 있겠죠.
▷이 생태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좋은 인력들을 모셔오는 것일 텐데요.
△주한별 컴퓨터공학부 교수=인공지능(AI) 분야에서 한국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습니다. 세계 최대 AI 학회 중 하나인 CVPR에서 발표된 논문 수도 한국이 제일 많은 수준이에요. 그런데 이 좋은 인력들이 학계가 아니라 기업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방대한 연구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사실 기업들이거든요. 또 기업에서도 많은 연봉을 주면서 학생들을 데려가려 합니다.
△조규진 교수=미국은 대학을 중심으로 RI(로봇연구소)가 잘 발달돼 있습니다. 거기엔 교수나 학생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들도 많아요. 교수만 봐도 '티칭 프로세서'도 있고 '리서칭 프로세서'도 있죠. 한국도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한국은 기술 역량을 가진 개발자만 강조하고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등한시하거든요. 결국 정부가 해야할 건 단순히 기술 자체에 매몰되기보다는 기술을 스케일업하는 데 도움을 줄 다양한 역할군들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게 곧 인력 양성의 길입니다.
△김상범 교수=한국은 지금 당장 무언가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당장 반도체 공동 연구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공격적으로 투자하기도 쉽지가 않아요. 기업 입장에서도 성과가 보장되지 않은 곳에 과감히 베팅할 수가 없잖습니까. 국가와 기업 양쪽에서 이 쪽에 힘을 실어주면 좋죠.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져야 할까요.
△박상욱 기계공학부 교수=한국에서 '수소'라고 하면 대부분 연료전지나 수소차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수소차에 쓰이는 수소는 전 세계 생산량의 0.1%도 안 되거든요. 수소에도 생산·저장·활용이라는 폭넓은 밸류체인이 있습니다. 활용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전반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영민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메타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메타버스라는 커다란 분야가 아우르는 기술이 매우 많습니다. 디바이스나 디스플레이 같은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콘텐츠, 통신 등 소프트웨어도 포함되고요. 전 세계적으로 메타버스에 돈이 몰리고 있지만 여전히 톱티어 기업들도 어떤 방향으로 산업이 흘러갈지 단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한별 교수=특히 AI 분야에서는 '한국형'이라는 키워드를 지양해야 합니다. AI는 기본적으로 '오픈'돼 있습니다. 한국이 이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공개된 코드 덕분입니다. 그런데 'K'같은 키워드가 붙는 순간 일종의 편향이 생기게 돼요. 한국적인 색채를 입히면 발전이 더뎌집니다. 미국은 미국형이라는 말을 쓰지 않잖아요. 한국도 기술을 주도해나가겠다는 취지를 갖는다면 그런 단어는 필요가 없습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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