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실험정신 녹인 현명한 10주년…중심 잡는 옥주현 [리뷰]

입력 2022-10-16 10:00  



"새장 속 새처럼 살아갈 수는 없어", "나의 주인은 나야. 난 자유를 원해"

누구보다 아름답고 그 무엇보다 화려하지만, 마음은 늘 허기로 가득했던 황후.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다 끝내 죽음과 입을 맞춘 그녀의 삶을 그린 뮤지컬 '엘리자벳'이 10년 명성에 걸맞은 완벽한 무대로 또 한 번의 감동을 안기고 있다.

2012년 국내 초연돼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엘리자벳'은 다섯 번째 시즌으로 한국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인물인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일생을 그린다. 70년간 스위스 정부의 기밀문서로 보관됐던 엘리자벳의 일기장과 '엘리자벳이 합스부르크 왕궁에 죽음을 데려왔다'는 오스트리아 민담을 기반으로 서사가 만들어졌다.

세계적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가 완성한 '엘리자벳'은 스토리·음악과 함께 압도적인 무대예술까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흥행 대작이다.

입체적인 스토리는 단숨에 관객 몰입도를 높인다. 엘리자벳을 암살한 혐의로 100년 동안 목이 매달려 재판을 받는 루이지 루케니는 "엘리자벳이 스스로 죽음을 원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의 이야기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엘리자벳 곁에는 '죽음'을 의인화한 캐릭터가 따라붙는다. 역사적인 사실에 판타지 요소를 더해 뮤지컬적 재미를 충실히, 그 이상으로 구현해냈다.


엘리자벳의 감정선을 표현해내는 데에는 음악과 함께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엘리자벳은 꿈꾸고, 시를 쓰면서, 아빠처럼 자유롭게 살겠다고 말하는 자유분방하고 활기찬 성격의 소녀였다. 그런 그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한 후 황실에서 이른바 '시월드'를 겪으며 자유를 박탈당하고 삶이 붕괴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상당한 감정 표현이 요구된다.

캐릭터가 지닌 모순을 그려내는 것도 중요하다. 엘리자벳은 자유를 갈망하며 새로운 행동에 나서지만, 역설적으로 억압된 모습이 여러 차례 그려진다.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며 국민의 편에 섰지만 그의 사치와 향락은 결국 민심을 다스리지 못했고, 자유를 찾기 위해 아들을 버리고 황실을 떠났지만 모성애는 끝내 그의 마음을 옥죄었다.

초연부터 다섯 시즌을 내리 함께한 옥주현은 엘리자벳 그 자체가 되어 연기한다. 쾌활한 어린 시절부터 늙어가는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변화하는 감정선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그려냈다.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호소할 땐 절절한 모성애가 들끓다가도, 자유를 노래하는 얼굴에는 이내 환희가 감돌았다. 시어머니인 소피 대공비에 맞설 땐 비장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가창력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황실에서 쌓인 케케묵은 감정을 고음으로 한 번에 터트리는 '나는 나만의 것'은 놓쳐서는 안 될 핵심 넘버다. 옥주현은 시원시원한 보컬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벅찬 감동을 안긴다.

엘리자벳 외에도 치명적인 매력으로 그를 유혹하는 죽음, 과거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루케니 역까지 인물 별 중요도가 높아 균형감이 특히 중요한 작품. 7년 만에 '엘리자벳'에 재합류한 신성록은 안정적인 톤에 매혹적인 분위기로 죽음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강태을은 능수능란한 말재주로 관객과도 호흡을 잘 주고받는다.


공연은 개막 전 캐스팅 논란으로 한 차례 홍역을 앓았지만, 배우들은 이를 잠재울 만한 연기를 펼친다. 당초 배역과 나이대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일었던 길병민은 성악 전공자답게 중후한 보컬을 내세워 우려를 씻어냈다. 논란 자체가 관람을 크게 방해하진 않는다.

10년 노하우를 결집한 현 프로덕션의 '엘리자벳'을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을 끝으로 무대 세트와 연출, 안무, 의상, 조명 등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기 때문. 그런데도 '엘리자벳'은 주요 배역에 친숙한 배우들이 아닌, 새로운 얼굴을 무려 12명이나 캐스팅했다. 길병민, 노민우에겐 뮤지컬 데뷔작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무리한 실험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공연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테다. 옥주현이 안정감 있게 중심을 잡는다면, 새 얼굴들은 향후 새 단장을 할 '엘리자벳'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향후 10년에 대한 가능성까지 연 '엘리자벳'의 현명한 10주년이다.

공연은 오는 11월 13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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